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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O Jun 20. 2021

이카루스의 야간비행

‘생택쥐페리’의 <야간비행> 속에서 ‘이카루스 신화’ 이미지 찾기

지금 우리는 자아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두 꿈을 잃은 채, 물질적인 안락만을 추구하려고 한다. 자기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리고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육체의 안락함에 만족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 판단을 할 줄 모르고, 어떤 결정이라도 혼자 하지 못한다. 그들은 항상 불안하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회피하고 한정 지으려고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런 상황으로부터 내 생각을 전개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이 잘못된 것이라고 모두가 인정한다. 우리는 더 이상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거대한 집단 속에 자신을 스스로 파묻을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이탈해서 개인으로 돌아와야 한다. 난 그것을 이카루스가 예상된 경로에서 벗어나는 이미지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태양을 향해 도달하려고 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끊임없이, 치열하게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탐구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끈질기게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내가 말하는 이런 개인적인 상태는 타인들과 완전히 떨어진 고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폐쇄되어 있는 개인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는 개인을 말한다. 다만,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문제에 몰두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았을 때, 난 두 가지 한계에 부딪쳤다. 위의 내용은 한 개인은 구원할 수 있지만, '나'를 제외한 타인들도 구원할 수 있을까? 나머지 하나는 자기 정체성을 찾고, 자기완성의 길에 이르렀다고 한들, 우리가 죽으면 무슨 소용일까? 죽음 앞에서도 나의 이런 생각은 유효할까? 지금부터 난 이런 물음들에 답하려고 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 모두가 개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각자의 섬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고립이 아닌 진정한 소통을 위한 준비단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모순적인 말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종종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마치 아무하고도 대화를 하지 않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그건 우리가 개인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을 때, 마치 자아를 상실한 껍데기와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에게 이런 생각을 강요하기보다는 우선 매 순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 행동을 봄으로써 우리는 타인을 일깨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굳이 그들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결정은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들을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다. 그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능력이 있음을 난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내 행동을 통해서 나 자신뿐 아니라 타인들도 구원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내가 말하는 개인주의는 결코 이기주의가 아님을 밝힌다. 이런 개인화 과정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서로 연대감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택쥐페리의 '야간비행'에 나오는 핵심사상이다. 즉, "사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 한 개인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죽음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기엔, 매 순간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치열한 삶을 생각할 시간도 부족하다. 난 여기서 생택쥐페리의 '야간 비행'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한다.

 

"생에는 해결책이 없는 법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있을 뿐이다. 그 힘을 창조해 내야 한다. 그러면 해결책은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

 

생에 해결책이 없다고 해서, 죽음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행동을 함으로써 매 순간순간을 잡아야 한다. 구원은 사후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속에서 매 순간순간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이 삶을 살아야 한다. 한 때는 죽음을 통해 우리는 영원화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나에게 죽음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우리가 인간 조건을 극복하고 영원화 된다는 것은 신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건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성모독이 될 것이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함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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