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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den Jun 06. 2022

잃어버린지도 몰랐던 것을
되찾는 순간

기억해 내고 싶었지만, 내가 까먹은지도 몰랐던

다시 마스크를 벗고 세상의 공기를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1년 전쯤 이런 생각을 했다. 시간이 흘러 한 달 전부터 마스크를 벗고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난 황홀함보다는 어색함과 익숙함만을 경험했다. 그런데 오늘 지하철에서 올라와 비 오는 거리를 마주하며 마스크를 벗었을 때, 비 냄새를 맡았고, 황홀함을 느꼈다. 가랑비를 맞으며 집까지 뛰어가는 길이 왠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마 1년 전 내가 정말 그리워했던 것은 '마스크를 벗고 세상의 공기를 마시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다만 나는 어떤 이유로 이것을 까먹었을 수도 있고, 혹은 마스크를 벗던 날 느낀 어색함 때문에 그 황홀함을 놓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만에 내린 비의 냄새가 '기억해 내고 싶었지만, 내가 까먹은지도 몰랐던' 감정을 다시 되찾게 해 주었다. 이처럼 어떤 이벤트는 잃어버린 감정과 생각을 되살아 나게 해 준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비의 냄새가 진짜 비의 냄새는 아니다. 비가 오는 날 흙속의 박테리아가 만들어 낸 물질이 빗방울 덕에 생긴 에어로졸을 타고 퍼진 냄새이다. 아마 비가 아니라 그냥 물을 뿌려도 비슷한 냄새가 나긴 할 텐데, 나는 이것을 '비 냄새'로 기억하기로 했다. 어쨌든 하필 내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비가 왔고, 박테리아가 만들어낸 이 냄새가 나에게 전달됐고, 나는 그 냄새 덕에 마스크를 벗는 행복감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생명체의 유기작용이 일어나고 비가 오는 것까지만 신비한 우주의 법칙이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법칙은 나의 뇌 속까지 뻗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하의 「별의 조각」이 떠올랐다.


무슨 이유로 태어나 어디서부터 왔는지 오랜 시간을 돌아와 널 만나게 됐어
의도치 않은 사고와 우연했던 먼 지 덩어린 별의 조각이 되어서 여기 온 거겠지
던질수록 커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해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사랑해 버린 모든 건 이 별에 살아 숨을 쉬어 난 떠날 수 없어
태어난 곳이 아니어도 고르지 못했다고 해도 나를 실수했다 해도 이 별이 마음에 들어

까만 하늘 반짝이는 거기선 내가 보일까 어느 시간에 살아도 또 만나러 올게
그리워지면 두 눈을 감고 바라봐야 해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사랑해 버린 모든 건 이 별에 살아 숨을 쉬어 난 떠날 수 없어
태어난 곳이 아니어도 고르지 못했다고 해도 내가 실수였다 해도 이 별이 마음에 들어

언젠가 만날 그날을 조금만 기다려줄래 영원할 수 없는 여길 더 사랑해 볼게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사랑해 버린 모든 건 이 별에 살아 숨을 쉬어 난 떠날 수 없어
태어난 곳이 아니어도 고르지 못했다고 해도 내가 실수였다 해도 이 별이 마음에 들어

낮은 바람의 속삭임 초록빛 노랫소리와 너를 닮은 사람들과 이 별이 마음에 들어


살다 보니 이런 순간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우주의 법칙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어떤 사건을 만나서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낚아 올리는 어부가 된다. 어쩌면 오늘 비 냄새를 맡고, 이런 생각을 한 것 앞에는 '별의 조각' 노래를 듣던 과거의 내가 이어져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을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기로 했다. 흙 속 박테리아의 냄새를 비 냄새로 기억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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