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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붱 Jun 19. 2020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삶

이 또한 지나가리라

OTP가 고장 났다. 그게 벌써 올해 3월에 일어난 일이다. 인터넷 뱅킹을 못한 지 어느덧 3개월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공인인증서의 유효기간이 올해 7월 말까지다. 갈수록 태산이다.


충분히 쟁여놨다고 생각한 마스크도 이제 2통 남았다. 코와 입 부근에 각각 와이어가 들어가 있어 얼굴형에 맞춰 쓰기 편한 마스크가 약 50여 장. 나머지는 일반 위생용 마스크 150장. 그 외에는 한국에서 시어머님과 친구가 보내준 KF94와 KF80 마스크가 있긴 한데 개별 포장으로 되어 있어 지금처럼 2-3일에 한 개씩 사용하다 보면 금방 동날 것 같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시중에서 마스크를 구하는 게 어렵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드럭스토어(한국의 올리브영과 같은 잡화점)가 한 군데 빼곤 없는 교외지역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엔 약국은 물론 일반 마트에서도 평범하게 진열되어 판매되던 마스크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여기까지 글을 쓰니 저절로 기분이 가라앉는다. OTP가 고장 난 것도, 코로나 사태가 터진 것도 모두 예상 밖의 일이었고 내 힘으론 어쩌지 못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가항력적인 일이 가져온 내 삶의 변화는 나를 충분히 불안하고 주눅 들게 만들었다.


만약 지금이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이었다면 OTP가 고장 난 나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을 거다. 일본에서 직장을 다니는 것도 아니니 적당한 때에 제일 싼 비행기 표를 결제하여 한국에 한 며칠 다녀오면 될 일이다.


마스크를 살 수 없다 해도 걱정 없다. 평소에 마스크를 잘 쓰고 다니지도 않았거니와 올해는 역대급으로 더운 여름이 될 거라는데 구태여 마스크까지 써서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더워 쪄 죽을 만한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을 테니까.


이 모든 것은 코로나 19라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질병으로 인해 일어난 일들이었다. 거기에 국가 간 교류가 정상화된 이례로 최악의 냉전 상태를 겪고 있는 한일 간의 갈등이 첨예하다는 것이 (정확히 따지자면 일본이 일방적으로 딴지를 걸고 있지만)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외국민인 나와 내 남편이 잠깐이라도 한국에 갈 수 없는 사태를 겪고 있는 이유다.


(일본은 현재 외국인이라면 일본 내 영주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번 일본에서 출국하면 재입국을 거부하고 있다. 한 마디로 나처럼 잠깐 일 보러 한국 갔다가는 다시는 일본에 발을 못 들인다는 소리.)


이렇게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에 초점을 맞추면 기분이 한도 끝도 없이 가라앉는다. 절망적이고, 한숨만 나온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초점을 맞추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앞서 얘기한 것들은 이렇게도 써질 수 있다.


OTP가 고장 났다. 


그런데 공인인증서의 유효기간은 올해 7월 말까지다. 송금은 못해도 최소한 은행 사이트에 접속하여 보험비가 잘 나가고 있는지, 쓸데없는 돈이 빠져나간 건 없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비록 7월 말 까지라는 기한이 정해져 있지만.)


그리고 은행 계좌에 연결해 둔 체크카드는 별 탈 없이 잘 사용되고 있다. 계좌에 돈이 남아있는 한도 내에서는 마음껏 결제할 수 있다.


물론 쓸 수 있는 돈의 한도(=체크카드에 연결된 계좌 내 잔액)가 생긴 만큼 무언가를 살 때 전보다는 더 신중하게 생각하게 됐다. 이걸 지금 꼭 사야 하는 건지. (코로나 사태가 진정될 것으로 예상하는) 내년에 사도 괜찮은 건 아닌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다른 것들로 대처할 수는 없는지 등등, 평소보다 몇 번은 더 심사숙고를 하며 무언가를 구매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뭔가를 샀을 때의 만족감이 덩달아 높아졌다.


마스크가 2통 남았다


나는 요즘 2-3일에 한 번 장 보러 마트에 나갈 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있다. 그런데 6월부터 남편이 다니는 회사가 단축근무를 시작했다. 매주 월/화/수 만 출근하면 되는데 그 와중에 월요일 하루는 재택근무를 한다. 심지어 회사에서 매주 3장의 마스크를 지급해 준다고 하니 집에 남아있는 마스크는 2-3일에 한 번 장을 보는 나만 사용하면 될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약 230여 장 남아있는 마스크만으로도 올해 말까지(혹은 그 이상으로까지) 어떻게든 버텨볼 희망이 생겼다.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에. 

가지지 못한 것보다 가지고 있는 것들에 더 집중하는 삶. 


이러한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나는 못 가진 것도 많지만 반대로 가지고 있는 것도 참 많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들에 한숨 쉬며 답답해하지 말고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삶을 당분간 즐겨봐야지. 


그러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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