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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붱 Jun 30. 2020

오늘 저녁은 3시부터 고민해볼게

인류 최대의 고민. <오늘 뭐 먹지?>

어린 왕자의 애정과 관심에 길들여진 여우는 말했다.

만약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자기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라고.


우리 집의 삼시 세 끼를 책임지는 일에 익숙해진 나는 말한다.

나는 아침 10시부터 오늘의 점심 메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고.


남편이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어느덧 세 달 째다. 원래는 4월 말까지였던 재택근무가 5월 말로, 6월 말로 연장된 것이다.


남편의 회사는 점심시간이 오전 11시 20분부터 12시 5분까지다. 왜 그런 애매한 시간대가 점심시간으로 지정된 건지는 알 턱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오전 11시 20분이라는 바로 그 시간뿐이다. 나는 그 시간 전에 남편과 나를 위한 점심 한상을 차려내야 한다.


그나마 오늘은 다행이었다. 어제 점심에 만들어 먹고 남은 닭볶음탕이 있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좀 부족할 것 같아서 두부를 한 모 썰었다. 키친타월로 꼼꼼히 물기를 제거하고 그 위로 소금과 후추를 뿌린다. 이걸로 두부부침의 재료 준비는 모두 끝났다.


우리 집 두부부침엔 밀가루가 없다. 계란 물도 없다. 그냥 소금과 후추. 식용유 조금만 쓸 뿐.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결혼 전 자취 한 번 한적 없는 철부지 30대 초반의 여자 사람인 나는 요리를 글로 배웠다.


책에 적힌 레시피대로 정량의 재료들을 준비하고 순서에 맞게 하나씩 해나갔다. 그런데 분명 레시피대로 했는데도 맛은 그냥 그랬다. 재료가 뭐 하나 부족했다거나 양을 잘못 계량한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니 그런 요리를 먹어주는 남편의 반응이 미적지근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아마 그래서였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 두부부침에 밀가루가 안 묻고, 나중엔 계란 물까지 빠져버린 것은.


인터넷에서 찾은 사진이다. 내가 만든 두부부침은 이렇게 정갈하지도 색색깔의 고운 옷을 입지도 않았다


만약 남편이 내 요리를 먹고 너무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워줬다면 나는 또 신나서 잘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이것저것 하려고 덤벼들었을 거다.


내 성격이 원래 그렇다. 누가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해주면 신나서 더 이것저것 하려고 한다. 내가 쓸데없는 일에 힘 빼지 않도록 남편 나름의 배려를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 중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


따끈히 데워진 닭볶음탕과 노릇하게 구워진 두부부침. 여기에 집 앞 마트에서 파는 한국산 봉지 김 하나를 까니 순식간에 그럴싸한 점심상이 차려졌다.


그렇게 약 45분에 불과한 남편의 점심시간 동안 묵묵히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내게 남편이 그런다.

오늘 저녁은 뭐야?


수세미로 벅벅 식기를 문지르고 있던 내가 말했다.      


“....... 3시부터 고민해볼게.”          



(2020.06.30.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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