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책을 많이 팔 생각이 없습니다

출판사를 차리긴 했는데요

by 코붱

얼마 전 이메일로 알라딘에서 메일이 하나 왔다. 광고성 스팸인가 싶어서 삭제하려던 찰나, 눈에 들어온 메일의 제목은 이러했다.


고객님의 등급이 골드 등급으로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살면서 골드 등급이란 걸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는 나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다급히 메일을 눌러 내용을 확인했다.


뭐라고 깨알같이 적혀있는 글자들 아래에 한눈에 들어오는 표가 하나 있었다. 바로 구매 금액별 회원 등급이 어떻게 나누어지는가를 나타낸 표였다.


알라딘은 최근 3개월간 책 구매 금액이 20만 원이 넘는 고객을 골드 등급으로 지정해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이 정한 골드 등급 회원이 맞았다. 지난 한 달간 알라딘에서만 최소 20만 원 이상에 달하는 책을 샀으니까.


알라딘의 골드 등급은 내가 우수 고객이라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표'라는 명함을 파기도 전에 '비용'부터 지불하고 시작한 초보 사업가의 훈장 같기도 했다.


출판사를 차려보자는 생각을 하며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던 내가 가장 먼저 찾았던 것은 단연 책이었다.


주로 출판사를 차려 운영 중인 대표가 쓴 책을 샀고, 그 외에 편집자는 물론 서점 MD가 쓴 책도 샀으며, 심지어는 인디자인 편집 디자인 책과 AI를 활용한 카드뉴스 만드는 법에 관한 책까지 샀다.


이렇다 보니 겨우 한 달 사이에 내가 책 구입에 쓴 비용만 20만 원이 훌쩍 넘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친 듯이 산 책들을 지난 몇 주간 차분히 읽어 나갔다. 각각의 책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단 하나, 모두가 한입을 모아 말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책은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건 '파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서점에 가면 표지가 예쁜 책, 내 취향인 글귀 같은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이제는 책장에 꽂힌 책들의 '등'을 보며 제작 단가를 가늠해 보고, 매대에 놓인 베스트셀러 뒤편에 숨겨진 마케팅 비용의 숫자를 짐작해 본다.


낭만적인 독자의 눈이 차가운 제작자의 눈으로 바뀌는 과정은 서글프고도 치열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내가 더 이상 독자나 저자가 아닌 책을 만드는 출판사 대표로 거듭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 의례임을 이제 막 출판사를 차린 햇병아리 대표인 나조차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여러 선배 출판인들의 책을 섭렵해 나가던 중, 그나마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나 발견했다.


30년이란 긴 시간 동안 출판의 길을 걷고 있는 서해문집 출판사의 김흥식 대표님이 쓴 『출판사 하고 싶을 때 읽는 책』의 한 구절이었다.


망하는 출판사는 책을 못 파는 출판사가 아니라 책을 많이 판 출판사라는 것이다.

(중략)

초판을 1천 부 찍는 출판사 대표는 그 규모에 맞추어 출판사를 운영한다. 직원 숫자도 그 적은 매출로 감당할 만큼 뽑고, 무리하게 마케팅 비용을 쓰거나 홍보비를 사용하지 않는다. 모든 씀씀이를 거기에 맞추어 운용한다.

(중략)

그런 출판사는 반드시 필요한 책만 출간한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기냐고? 500명이, 1천 명이 반드시 필요로 할 책만 출간한다."

— 『247p, 출판사 하고 싶을 때 읽는 책, 김흥식, 그림씨(2021)』


숫자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한 권에 담긴 이야기의 가치'를 지키라고. 매출의 규모가 아니라 '지속의 규모'를 고민하라고 말해주는 그 한마디는 내 눈과 머리를 거쳐 가슴속 깊은 곳까지 내려와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이로써 우리 출판사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 명확해졌다.


첫째, 우리 출판사는 1쇄 최대 1,000부, 혹은 500부 이하로만 책을 제작한다.


둘째, 우리 출판사는 무리한 마케팅 비용이나 홍보비를 사용하지 않는다.


셋째, 우리 출판사는 많이 팔리진 않더라도 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책만 출간한다.


이것만 지킨다면 비록 돈은 크게 못 벌 지언정 세상에 꼭 필요한 책을 쉬지 않고 꾸준히 출간하는 출판사는 될 것 같았다.


그거면 된다.


1,000명이 아니라 단 500명에게라도 뼈아프게 필요한 책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들을 위한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싶다.


내 방에 유일하게 있는 4단짜리 책장의 1열에는 어느새 알라딘 골드 등급의 대가로 얻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예전 같으면 그저 든든한 지식의 창고였을 이 풍경이, 이제는 내가 지켜내야 할 약속처럼 보인다고 하면 너무 거창한 표현이려나.


화려한 베스트셀러의 길은 아닐지라도,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조용히 숨 쉬며 오래도록 읽힐 책.


그런 책 한 권을 세상에 보태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이 한 마디를 주문처럼 조용히 되뇐다.



저는 책을 많이 팔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 꼭 필요한 책만 조용히,
그러나 쉬지 않고

꾸준히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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