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를 차리긴 했는데요
끝날 듯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첫 교정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현재 작업 중인 책의 장르는 에세이다. 작가가 쓰는 문체와 이야기의 개성을 최대한 살려야 하는 에세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교정을 해도 최대 3교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던 내 생각은 3교가 4교가 되고 4교가 5교가 되는 상태로 넘어설 때쯤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물론 교정이 거듭될수록 수정되는 분량은 극히 적어졌지만 그 작은 하나하나의 수정들이 우리 책의 퀄리티를 높여주는 것은 분명했기에 자꾸만 원고를 들여다보고 출간 기획서를 수정하고 머리를 싸매는 시간이 늘어갔다.
처음 교정지를 보여드렸을 때 작가님은 말씀하셨다.
"번역을 하셔서 그런가, 어쩜 이렇게 제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잘 나타나도록 다듬어주셨는지, 무척 놀랐어요. 마치 제 마음을 번역해 주신 것 같았달까요?"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런 거였다고 흥분한 기색으로 말씀하시는 작가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번역일을 하기를 참 잘했다고.
내가 본격적으로 번역 공부를 시작하고 출판 번역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인 2022년이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도 번역가는 AI로 대체될 수 있는 직업군 중 당당히 1,2위를 다투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번 번역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던 것은 눈여겨보고 있었던 번역 아카데미 수업이 코로나의 여파로 딱 그때만 온라인으로 강의가 진행된다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도 나는 일본에 살고 있었고 첫 책을 낸 지 2년이 지났음에도 별다른 소득은 없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막막해하던 참이었다.
약 4개월간 들은 수업은 모 번역 아카데미의 출판 번역 입문반이었다. 해당 아카데미는 입문반과 실전반으로 나뉘어 운영됐다. 아카데미 소속으로 일감을 받으려면 실전반까지 이수해야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실전반은 오프라인으로만 진행됐고, 한국에 오래 나가 있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입문반 수업을 들었고 아카데미를 수료한 뒤에는 해당 업체가 아닌 다른 번역 에이전시를 통해 이런저런 일감을 받기 시작했다.
만약 그 당시에 내가 '어차피 번역가로 데뷔도 못 할 텐데 수업을 들어서 뭐 하나'라는 생각에 입문반 수업을 안 들었다면 역서를 2권이나 내고 출판사를 차려 다른 이의 원고를 다듬는 지금의 이 일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찌어찌할 수 있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마치 내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었나 싶었다'는 감상을 받을 수 있는 원고를 뽑아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과거로 돌아가 번역 공부를 하자고 마음먹었던 4년 전의 내 머리를 잔뜩 쓰다듬어주고 싶어졌다.
애플의 창립자이자 이제는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졸업식 축사에서 했다는 말이 있다.
미래를 내다보며 점을 연결할 수는 없고, 오직 과거를 돌아볼 때만 연결할 수 있다고. 그러니 지금의 점들이 언젠가 이어질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대학을 자퇴한 뒤 캘리그래피 수업을 청강했다고 한다. 생계에도, 경력에도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이던 그 경험이 10년 뒤 매킨토시를 설계할 때 결정적인 영감이 됐다고 한다.
4년 전의 내가 찍었던 '번역'이라는 점이 지금의 내 모습으로 이어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찍고 있는 '출판사 대표'라는 이 점이 미래의 나를 어디로 이끌지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몰입하며 찍은 점들이, 언젠가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곳이 나쁘지 않을 거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