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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E May 12. 2023

슬픔의 삼각형, 그리고 클리닝 레이디

영화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포브스가 선정한 올해 가장 웃긴 영화라는 말이 납득이 가는 영화. 이 작품은 <기생충>과 같은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계급 우화라는 점에서 같은 결을 가지나, 한 발 더 나아간 작품이다. <기생충>은 훌륭함에도 가난을 대상화하는 느낌이 있어 불쾌한 지점이 있었는데, 이 작품은 가난 대신 부만을 미친듯이 대상화해서 너무 웃겼다. 풍자는 약자가 아닌 강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먼저 이 작품의 배경은 초호화 유람선이다. 이 작품에서 유람선이라는 공간은 마치 세계화에 따라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심화된 계급 불평등을 전시해놓은 공간으로 쓰인다. 유람선에서 먼저 비춰지는 대상은 손님들이다. 3부로 나뉘어진 1부의 주인공이었던 패션 모델 인플루언서 커플이 2부의 초반을 이끈다. 이들의 시선이 흐르는 방향으로 2부의 초반은 흘러간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손님은 트레일러에도 등장한 러시아 자본가이다. 자신을 ‘shit seller’라 부르는 그는 선원들에게 불필요한 퍼포먼스를 강요하고, 이를 통해 유람선을 유지하는 노동자들은 얼굴을 일단 내민다.


유람선이 떴으면 돌풍을 만나기 마련이다. 승무원들은 별거 아니라 말하지만, 선장과의 식사 자리에서 점차 강해져가는 돌풍은 승객들의 구토를 유도하고 불안에 떨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의 러시아 자본가와 선장은 걱정이 없다. 그저 카드 게임이나 하며 술을 마실 뿐이다. 술김에 내뱉는 사회주의 토크는 우습기 그지 없다. 자신이 무슨 혁명가라도 된양 굴지만, 그들은 가장 안전한 온실 속에서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대화만을 나눌 뿐이다. 이때 돌풍으로 인해 엉망이 된 선박 내부와 부자들의 토사물을 치우는 노동자들이 대조되며 등장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무의미함을 강조한다. 실제의 노동자에게 관심도 없으면서 사회주의에 대해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그렇기에 이들의 대화는 실소를 자아낸다.


돌풍 이후 무엇이 오겠는가. 바로 전복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돌풍이 끝난 뒤 뜻밖의 사건이 배의 전복을 유발하긴 하지만, 어쨌든 이 배는 전복되고 단 8명만이 배에서 살아남는다. 3부의 이름은 island. 3부가 진짜다. 1, 2부도 재밌었지만 3부에 비하면 그것들은 3부에 쓰이기 위한 설정값들을 만드는 과정에 불과해보일 정도로 재밌다.


3D 노동의 외주화로 할줄 아는 거라곤 돈 쓰기 뿐인 이들 속에서 인물들의 위계는 전복된다. 유일하게 불을 피울 줄 알고, 낚시를 할 줄 아는 애비게일이 여기서는 대장이 되는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선박에서는 ‘cleaning lady’지만, 이 섬에서는 ‘captain’이다. 처음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던 이들은 식량 때문에 무너지고 만다. 상황에 따라 권력을 쥔 이는 바뀌기 마련이다. 그게 자연 상태로 회귀해서야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이들의 관계성 중에서도 양성평등주의자였던 칼과 애비게일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1부에서 그는 잘 나가는 모델이었음에도 이마에 ’슬픔의 삼각형‘, 즉 주름을 가졌다는 이유로 모델계에서 인기를 누리지 못한다. 제1세계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고난은 ’슬픔의 삼각형‘인 것이다. 그에 반해 애비게일의 삶은 어떠한가. 우리는 애비게일의 특별한 전사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는 유추할 수 있다. 그는 러시아 자본가가 ‘shit seller’로서 살아갈 때, 청소 담당으로 ’shit’을 치워왔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삶은 또 얼마나 고됐겠는가. 그 두 사람이 이루게 되는 관계성은 이런 대조적인 정체성을 이유로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유한할 수밖에 없는 모계공동체를 누리는 애비게일의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지만, 동시에 안타까웠다.


결국 이 작품의 큰 줄기는 클리셰 그 자체이다. 주인공이 유람선에 탑승하고, 그 배가 전복되어 무인도에 표류하는 이야기. 그러나 이 클리셰에 감독은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제대로 입혀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특히 이야기를 쌓아올리는 재주가 장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부담스러웠는데 버릴 순간이 없었다. 영화관에서 이토록 웃어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웃었다. 좋은 영화이니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루벤 외스틀룬드는 이 작품으로 미국에 사회주의를 전파시키길 바란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 한국에도 사회주의를 전파해주길 바라며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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