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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피디 Nov 07. 2019

쓸모 있는 위로

3호선 구파발행 3334호 열차 

 어떤 위로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날이 있다. 온종일 쉴 틈 없이 바빴던 일과 때문인지, 다가오는 기한일에 비해 별 진전이 없는 업무 부담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회의 때 내뱉은 멍청한 말실수가 자꾸 생각나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그런 날이 있다. 온몸의 힘이 축 빠지고 남아있던 의욕마저 모두 소멸할 것 같은 날, 세상 모든 중력이 내 어깨를 끌어당기는 것 같은 날, 빨리 이불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잠을 청하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


 일과를 마친 그날도 퇴근 후 평소처럼 3호선 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은 내가 탄 뒤로 두어 정거장쯤이 지나면 한강을 건너는데 10월 무렵의 퇴근길에는 한강 철도 위에서 노을을 볼 수가 있었다. 움직이는 열차의 창문 너머로 노을을 감상하는 일은 꽤 낭만적이었다. 어떤 무기력도 반짝이는 강물과 붉은 하늘 앞에서 생명력을 되찾곤 했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켜켜이 쌓인 구름에 가려 기대했던 붉은 노을은 오간대 없었다. 칙칙한 회색 하늘뿐이었다. 큰 위로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내심 기대했던 관경이 아닌 것을 보자니 서운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안 되는 날은 뭘 해도 안된다고 했다. 댓 발 내민 입술이 내 마음을 대변할 뿐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울적한 심정이 이어지고 있을 때 지하철 안에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인지 평소보다 길었다. 스피커를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도 3호선 구파발행 3334호 열차를 이용해주시는 고객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내셨나요? 힘든 하루였나요? 보람찬 하루였나요? 행복은 느끼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들고 지친 하루 속에서 우리가 눈치채지 못한 행복이 얼마나 많나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앞 날이 항상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신경한 표정으로 휴대폰만 쳐다보거나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삭막한 열차 안에 가득 차 울리는 다정한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그곳과 어울리지 않아 이질감마저 들었다. 듣는 이가 없는 위로의 말은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 말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위로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은 내가 그 말들에 기꺼이 동요당한 후였다. 상처가 많은 사람에게는 작은 말 한마디도 비수가 되듯이, 낮아지고 연약한 마음은 작은 자극에도 쉽게 반응했다. 위로의 말도 그랬다. 지쳐있던 나에게 뻔한 그 문장들은 아주 쓸모 있는 위로가 되었다. 


 '회의 때 말실수 좀 하면 어떠한 가. 퇴근길 하늘이 붉은색이 아니면 좀 어떠한 가. 구태여 행복하려 애쓸 필요는 없지만 느끼는 만큼 행복한 것 또한 삶인 것을. 이토록 만만한 것이 삶인 것을!'


 마치 나만을 위해 예전부터 미리 준비된 것 같은 목소리는 내게 뜻밖의 위로였고 선물이었다. 더없이 따뜻했다. 어떤 위로도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그 날, 서툰 몇 마디에도 금세 녹아버리는 이 하찮은 마음을 보니 웃음이 났다. 누군가도 나와 같은 마음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껴두었던 말들이 떠올라 나는 부끄러웠다.


 단 한마디의 위로가 어렵던 때가 있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나는 늘 어떤 슬픈 표정에게 '완벽한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간을 공감한 후에, 반박의 여지없이 완벽한 해결책을 제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야 말로 멋진 위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고 작은 사람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려웠다. 진심 어린 위로를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허공에 맴도는 어설픈 단어들만 바보처럼 쳐다보다가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단 한마디의 위로가 어렵던 때가 있었다.


 상대방이 원했던 것은 진심 어린 공감 한마디였을텐데 그걸 모르던 시절이 너무나도 길었다. 투박하게 흘러나오는 위로의 말들에게 기꺼이 동요당한 그 날, 3호선 구파발행 상행 열차를 타면서 나는 쓸모 있는 위로에 대해 생각했다. 조금 어설프고 투박하면 어떠한가. 멋진 해결책이 없으면 어떠한가. 진심이 가 닿을 수만 있다면 초라한 문장이라도 나는 진정으로 위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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