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여 붙잡지 않게 된 관계
나이가 들면서 옷장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 옷들이 늘어난다. 유행이나 취향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불편해서 손이 가질 않는 옷. 몸에 꽉 맞게 붙는 티셔츠나 신축성 없는 원피스, 다리 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청바지가 그렇다. 앉고 일어설 때마다 사방에서 조여 오는 압박감에도 "예쁘면 장땡이지."라는 말 하나로 모든 것이 이해되던 때. 자주 선택받는 옷들 사이에 엉거주춤 껴있는 '불편한 옷'들이 꾸역꾸역 자리를 지켜낸다.
그래서인지 자주 입는 옷들은 정해져 있다. 편한 옷이다. 청바지보단 롱치마, 재킷보단 가디건. 아무렇게나 툭툭 걸쳐도 좋을 만큼 편한 옷을, 나는 '나다운 옷'이라 정의하기로 했다. 짜 놓은 사이즈 안에 내 몸을 꼭 맞게 가두는 것은 왠지 나답지 않았다. 어쩌다가 한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그날은 하루 종일 배에 힘을 주고 다녀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위적이다. 도저히 나답지가 않은 것이다. 편한 옷만 찾는 나를 보고 누군가는 아줌마가 되어가는 과정이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스스로에게 집중해 나가는 과정이라 하고 싶다. 20대 초중반에는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예쁘지만 불편한 옷'들을 골라 입었다면, 지금은 나 스스로에게 편하고 부담 없는 것이 선택의 가장 큰 기준이 됐기 때문이다. 삶을 대하는 시선이 밖에서 안으로 굽는다.
함께 있을 때 가장 나다워질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은, 편한 옷을 입은 것처럼 나를 자유롭게 했다. 무심코 터져 나오는 웃음 앞으로 입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 머릿속에 떠다니는 각종 단어 중에 몇 가지만 선별하여 내뱉는 그 피곤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내 모습 그대로를 망설임 없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과의 만남은, 편한 옷을 입은 것처럼 나를 자유롭게 했다. 반대로 함께 있을 때 도저히 나다울 수 없는 관계는 불편한 옷을 입은 것처럼 가슴께가 답답했다. 보통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관계가 그랬다. 가장 편한 옷이 가장 나다운 옷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에 나는, 그 관계를 구태여 붙잡지 않게 되었다.
어떤 작가는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고 (중략) 삶의 체형에 맞게 인연도 변해간다고"고 했다. 이 작가의 말에 의하면 내가 불편하다고 여기는 관계는 단지 삶의 체형에 맞지 않는 인연일 뿐, 생의 시기나 삶의 형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내가 지금 자유로울 수 있다고 여기는 관계 또한, 삶의 체형이 변해감에 따라 언제든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나고 헤어짐이 반복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함께 있을 때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사람, 적어도 지금 내 옆에 남은 인연들이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혹시라도 삶의 체형이 변하여 나랑은 더 이상 맞지 않는 인연이 된다면 그땐 이 작가의 말을 이해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구태여 붙잡지 않게 된 관계를 한번쯤은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