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쓴 '인간 선언'에 대한 거부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호모 두두리, 질문하는 인간의 새로운 이름
책을 펼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그림책을 처음 손에 쥔 아이도, 추리소설을 읽느라 밤을 새는 어른도, 그 순간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문을 두드리는 일. 이것이 바로 독서의 본질이다. 올해의 도서전은 여기서 출발한다.
2026년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는 ‘호모 두두리’다. 두두리는 한국의 옛 문헌에 등장하는 신화적 존재로 도깨비의 원형이다. 또한 대장장이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두두리는 불 앞에서 달아나지 않고 불을 응시한다. 불은 나무로 된 두두리의 몸을 태워버릴 수도 있는 두려운 대상이다. 그러나 두두리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에게는 불을 다루는 슬기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앞에서 AI라는 불이 세차게 타오르고 있다. 무엇을 물어봐도 AI는 막힘없이 답한다. 단숨에 소설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영화를 찍는다. 이 불을 피할 길은 없다. 그렇다면 이 세찬 불길 앞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슬기가 필요할까?
욥은 잿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자식도, 재산도, 건강도 다 잃었다. 세 친구가 찾아와 그를 위로했다. 고통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논리적으로 완벽한 답이었다. 그러나 욥은 그 답을 팽개치고 신을 향해 묻는다. 왜 의로운 자가 고통받느냐고. 어떻게 악한 자들이 번영하느냐고. 사람은 왜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오지 않느냐고. 이 무모한 질문에 신은 정답을 말한 세 친구가 아니라 욥의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폭풍 속에서 더 큰 질문으로 대답한다.
장자는 이 이치를 다른 방식으로 꿰뚫었다. 어느 밤, 나비가 된 꿈을 꾼 그는 이렇게 묻는다. 내가 나비를 꿈꾼 것인가, 아니면 지금 나비가 인간인 나를 꿈꾸는 것인가? AI라면 즉시 답할 것이다. 압도적으로 높은 확률로, 당신은 인간이고 나비는 꿈이었다고. 그러나 장자의 질문이 겨냥하는 것은 바로 그 ‘압도적인 확률’이 전제하는 이분법 자체다. 꿈과 현실, 옳음과 그름 사이에 그어진 경계는 과연 자명한가?
여기에 인간과 AI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AI는 가장 확률이 높은 답으로 가능성의 문을 닫는다. 인간은 더 큰 질문으로 그 문을 다시 연다. 욥의 질문은 고통의 의미를 새로 쓰게 했고, 장자의 질문은 현실의 경계를 허물었다. 인류의 사유가 매번 한 걸음씩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간 것은 확률이 가리키는 답이 아니라, 그 답 너머를 향한 질문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질문들의 기록이 바로 책이다.
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에게 다가간 최초의 인간 이후로, 인간은 그 불로 무언가를 만들어왔다. AI라는 불도 다르지 않다. 문제는 불이 아니라, 이 불로 어떤 질문을 벼려내느냐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더블린의 청년 스티븐 디덜러스는 그 순간을 이렇게 썼다. “어서 오라, 삶이여! 나는 이제 백만 번씩이라도 경험의 현실을 만나러,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종족의 의식을 벼리러 가겠노라.”
그렇다. 인간은 확률이 정해준 답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답을 자신의 뼈아픈 경험이라는 뜨거운 불 속에 다시 던져 넣고, 맹렬한 질문의 망치질을 거듭한다. 과거의 패턴 속에서 정답을 반복하는 기계와 달리, 인간은 끝없이 질문함으로써 이 세상에 ‘아직 창조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의 길을 열어젖힌다. 그것이 인간이 불을 다뤄온 방식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안전한 대답을 거부하고 백만 번씩이라도 미지의 삶 속으로 뛰어드는 자. 새로운 불을 응시하며 영혼의 대장간에서 더 큰 질문을 벼려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문을 두드리는 자. 그가 바로 호모 두두리다.
2026년 서울국제도서전은 그 질문들이 모이는 자리다.
지금, 당신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공동작성 : 김연수, 클로드 소네트 4.6, 제미나이 3
원문 링크: https://sibf.kr/page/11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소개글이 공개되었다. 글의 공동 작성자는 김연수 작가와 LLM기반 생성형 인공지능인 클로드와 제미나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인간과 AI가 ‘협업’한 결과물이다. 정확히는 거대 언어 모델에 기초한 생성형/대화형 인공지능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그냥 여기서는 편의상 AI라고 부르겠다.
이 글에서 AI는 두 가지로 비유된다. 첫 번째는 ‘불’이다. AI는 “피할 길 없는 불”이고 “세찬 불길”이다. 이는 AI가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이 크고, 이 영향을 책과 출판도 피할 수 없음을 말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에서 또 하나의 ‘불’이 등장한다. 그 불은 “(인간의) 뼈아픈 경험”이다. 인용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다시 인용하면 인간은 삶에서 “경험의 현실”을 만나 “의식을 벼릴”수 있는 존재이다. 작성자들은 이 경험이라는 불과 비교하여 AI를 “새로운 불”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불로 다시 더 큰 질문을 벼려내는 존재를 ‘호모 두두리’라고 명명한다. 이 과정에 의해 새로운 불(AI)은 기존의 불(경험)과 병존하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로, AI는 ‘기계’에 비유된다. 기계는 “정답을 반복”한다. 두 비유를 겹쳐 생각하면 이 “새로운 불”은 한편으로 확률이 높은 답 ―또는 정답― 을 반복하여 가능성의 문을 닫는다. 다시 말해 “새로운 불”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글 안에서 충돌한다. “가능성의 문을 닫는” 불-기계를 인간이 왜 새롭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 새로운 불은 정말로 더 큰 질문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열 수 있는 방법인가? 인용된 장자와 욥기에서 인간은 이미 기존의 불로 가능성을 열어내지 않았는가? 이 새로운 불에 질문을 벼려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에 이 글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글은 지나치게 수사적으로 유려하다. 성경과 제임스 조이스와 장자와 신라 시대의 설화가 교차하면서 질문과 대답의 경계, 인간과 AI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욥의 질문에 대한 친구들의 대답은 논리적으로 완벽한 답이 아니지만 정답으로 간주되고, 욥기와 장자의 질문이 겨냥하는 바는 다르지만 함께 인용되어 봉합된다. 그렇게 허술한 연결고리가 수많은 은유로 덮이면서 논지와 무관한 호소력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 호소력에는 실체가 없다. 인용과 은유가 조성한 분위기에 기댈 뿐이다.
만약 이 글을 AI가 작성했다는 표지가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글을 따져가며 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냥 “화려한 글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정도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그냥 그렇게 “넘어갈” 수 있었다면 이유는 저자인 인간에 대한 신뢰일 것이다. 작가가 사색과 고민을 거쳐 작성한 글이니 저 상징과 은유의 틈 안에 내가 이해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글쓴이의 서투름이 텍스트를 모호하게 만들었더라도 그 안에는 인간으로서 전하고자 하는 진실된 무엇이 있으리라는 믿음. 그 믿음은 내가 깨닫지 못한 바를 정확히 찾아내려는 동력이 되고, 마침내 구체적인 질문으로서 완성된다. 이것은 비단 이 소개글을 읽은 내 머리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독서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하고 답을 찾는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해라는 열매를 얻는다. 그러나 작성 과정에 AI가 협력했다면, 즉 저 단어의 연쇄가 의미를 통계적으로 적절하게 조합한 결과일 뿐이라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어떻게 개입했는지 알지 못한다면, 독자는 이해할 대상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읽는 목적의 상실이다.
서울국제도서전의 소개글을 독자는 무엇을 이해하기 위해 읽을까. 사람마다 제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인간 선언’을 읽으며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가늠해보려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체 인간다움이란 무엇이며,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고민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 모든 인간에게 적어도 하나씩 있다. 책을 읽으며 그 질문이 깊고 단단해지지만 인간은 답을 내릴 수 없음을 안다. 그때 다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새로운 책을 펴는 일이지만, 답이 필요없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인공지능은 결국 인간에게 되묻는 수밖에 없다. “지금, 당신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나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