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무게(뤼시 미셸 著)'에 대한 보론
뤼시 미셸 저, ‘말의 무게’를 읽었다. 그간의 많은 책들이 ‘말에는 힘이 있다’라는 명제를 당위로서 받아들이고 그리하여 어떤 말을 써야 하는가에 대해 주로 이야기해왔다면, 이 책은 ‘무슨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조금 더 초점을 맞춘다. 적절한 지적들과 생각할 거리들이 풍부해서 고등학생 정도가 읽기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면서도 몇 가지 답답했던 부분을 정리해본다.
1.
뒤표지의 추천사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꼽히는 프랑스어에 차별과 혐오가 담긴 채 사용되는 현실은, 가장 평등한 언어로 꼽히는 한국어의 오늘과 상당히 유사하다.”
프랑스어와 한국어의 현실이 차별과 혐오에서 만나게 되는 안타까운 양상에 공감하면서도, "가장 평등한 언어"라는 말이 쉽게 머릿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아름다운 언어’와 ‘평등한 언어’ 앞에 ‘가장’을 붙여 줄 세우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언어의 아름다움’과 ‘언어의 평등함’을 측정할 잣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언어’와 ‘평등한 언어’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어떤 기준에 의해 언어의 평등함과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 있는가? 나는 프랑스어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으니까 한국어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어는 가장 평등한 언어인가? 아니 그 전에 언어가 평등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언어가 평등하다”라는 문장은 여러 맥락에서 사용된다. 일단 각 언어 간의 위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쓸 수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평등하고, 중국어와 독일어가 평등하며, 영국어와 미국어도 평등하다는 서술 같은 걸 하고 싶을 때 쓰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 간의 관계는 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의 관계와 그 위상 차이에 영향을 깊게 받고, 맥락에 따라 다양한 위계를 형성하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간단한 예로 국제적인 회의 장소에서 프랑스어와 한국어는 평등하게 대우받지 않고, 한 국가 안에서도 서울 방언과 호남 방언 역시 평등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또한 세계의 언어들이 평등하다면, 당연히 ‘가장 평등한 언어’도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인용한 문장에서 ‘(가장) 평등한 언어’라는 표현은 명확하게 한국어를 지칭하고 있으므로, 언어 간의 평등에 대한 문제라기보다 이는 국가어로서의 한국어가 다른 언어에 비해 더 평등하다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 각각의 언어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그리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측정할 수 있는 일종의 평등에 대한 척도가 존재하고, 이를 토대로 각 언어를 비교하였을 때 한국어가 다른 언어보다 더 평등하다는 얘기다. 그런 척도를 몇 가지 기준에서 생각해볼 수는 있다. 이를테면 사회 계급별로 언어가 구분되어있는 사회에서 언어는 불평등하다. 11세기 잉글랜드에서 프랑스어와 영어의 관계라든지,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와 영어의 관계와 같은 양층어 상황(diglossia)을 예로 들 수 있다. 양층어 상황이란 하나의 사회에서 둘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고, 이들 언어의 기능 또는 위상에 차이가 나타나는 상황을 일컫는다. 양층어 상황까지 나아가진 않더라도, 사회적 계급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를 수도 있다. 윌리엄 라보프의 뉴욕 시 음운 변이 연구나, 피터 트루질의 노리치 음운 변이 연구에서는 모두 사회 계급에 따라 사용하는 음운이 달라짐을 확인하였다. 이때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그 사람의 사회 계급을 판단할 수 있다면 그런 사회에서는 언어가 불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2.
언어를 사회에 분포된 자원(resource)이라고 생각해보면, 이 언어라는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모든 언중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는가를 가지고도 언어의 평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언어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 언어로 표현하는 데 있어 계급적인 제약이 없다면 그 사회에서 언어는 평등하다. 전자에는 오늘날까지 경제적이나 사회적인 이유에서 언어 교육이 불평등하게 이루어지던 많은 사례가 있을 것이다. 후자의 반례로서, 군대 사회에서는 계급이 낮은 병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말을 극도로 제약함으로써 불평등성을 각인시킨다. 좀 오래된 예지만, 2004년에 군대를 간 친구는 상급자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한 “예”와 “아니오”를 모두 “충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게 하는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 경우 “충성”이라는 발화는 그 발화를 요청한 상급자에 의해 아주 많은 경우 “예”로 해석되고, 하급자는 “아니오”라는 언어 자원에 접근하는 데 큰 제약을 받게 된다. 이건 좀 극단적인 경우라 해도, 군대에서 대화할 때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ㅂ니다’와 ‘-ㅂ니까’형만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약된다. “군대에서는 다나까만 쓴다”라는 통설과는 달리 상급자는 하급자에게 말할 때 이러한 제약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하급자는 다양한 종결어미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표현에 제약을 받고 불평등한 언어생활을 수행한다. 그 와중에 ‘~지 말입니다’와 같은 사회 방언이 이러한 제약을 회피하기 위해 탄생하기도 하는데, 하여튼 이러한 현상들이 모두 그 사회 내에서 쓰이는 언어가 불평등함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언어로서 접근할 수 있는 세계가 언중 개개인마다 다르다면 이는 불평등하다.
3.
어쨌든 저런 나름의 기준을 세울 수 있고, 그걸 측정도 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한국어는 다른 언어에 비해 정말로 평등한가? 이 책의 ‘평등한 말과 글’이라는 챕터에서는 이와 같은 주장에 근거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2008년 조사 결과 한국의 식자율은 98%입니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는 100명 가운데 98명꼴로 말과 글을 알고 있다는 의미죠. 이 수치는 2022년 세계 평균인 86.89%보다 높은 수준입니다. 식자율이 높다는 것은 곧 사회적 지위, 사는 지역, 연령, 성별, 경제적 수준, 학력 등 여러 가지 차이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비교적 평등하게 언어를 알고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조사의 출처는 2008년 ‘국민의 기초 문해력 조사’인 것으로 추측된다. 총 5,212가구의 12,137명을 대상으로 하여 방문 면접 조사로 진행된 이 조사에서는 98.33%가 ‘문해자’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로 보면 한국의 식자율이 98%라는 진술은 오히려 다소 현실을 축소해서 쓴 셈이다. 그러나 이 수치만을 가지고 ‘한국어는 평등한 언어’라고 하기에는 몇 가지가 걸린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이 문해력 조사에서 나타난 1.67%의 비문해자는 읽고 쓰는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 즉 ‘완전 비문해자’만을 일컫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문해자로 분류된 98.33%의 집단에는 '단어는 읽을 수 있으나 문장 이해 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5.3%)'부터 '어렵고 복잡한 글을 읽어내고 추론할 수 있는 사람(35.1%)'까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100명 가운데 98명이 말과 글을 알고 있다.”는 내용은 사실이지만 그 수치 하나만으로 그 안에 담긴 ‘사회적 지위, 사는 지역, 연령, 성별, 경제적 수준, 학력’을 “막론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문해의 수준에는 그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필요한 것은 그 차이를 외면하지 않고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그 원인은 위에서 막론한 ‘성별, 학력, 경제적 수준, 연령’에 그대로 기인한다. 여성 비문해자가 남성 비문해자보다 많다. 고연령층 여성은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문해력은 떨어진다. 역시 고연령층이 지금의 젊은 사람보다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졸 이상인 사람은 무학이나 초등학교를 중퇴한 사람보다 문해력이 높다. 소득 수준과 독서량도 문해력에 유의미한 차이를 미친다. 성별도 연령도 교육과 소득 수준도 누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선택하지 않은 이들 범주가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의 차이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평등하지 않다.
4.
‘가장 평등한 언어’, 혹은 ‘세계 평균보다 높은 수준’이라는 말이 사실 별 의미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가 평등한 언어를 이상으로서 희구하는 한 나아갈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할 것인데, 그래도 우리가 누구보다는 많이 와 있다는 말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 그 가치를 비교하는 대신에 우리는 언어에 대한 더 많은 질문과 논쟁을 해야 한다.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로 더 평등한 언어를 연마해야 한다. ‘미개인’이라는 말에서 그 안에 담긴 식민 지배의 역사를 읽어내는 것, ‘그’와 ‘그녀’를 타고난 성별에 따라 부르는 것이 트랜스젠더에게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성폭력을 ‘일탈’이라고 부르는 미디어에 반대하는 것 등이 이 책을 읽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연마의 일부일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 굳이 ‘문맹’과 ‘문맹률’이라는 말을 썼어야 했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말은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눈멀 맹(盲)이라는 한자가 오늘날 ‘읽고 쓰지 못한다’는 뜻으로 쓰여도 되는가? 눈으로 볼 수 없으면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위에서 인용한 보고서에서도 이 말 대신 ‘비문해’와 ‘비문해율’로 바꿔 쓰고 있는데 왜 번역 과정에서 굳이 이런 낡은 언어를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5.
이 책 13페이지엔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가 말하거나 글을 쓸 때에 고르는 모든 단어는 우리가 사람 혹은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잘 알려주니까요.”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가 무슨 사이지?”라는 질문은 연인이 되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난감하지 않다. 세계와 우리는 무슨 사이인가? 우리는 언어를 통해 낯선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세상의 어떤 관계도 순탄하지 않다. 오해하고 틀리고 다투고 고쳐나가며 단단해진다. 그 과정을 버티게 하는 것은 좋은 관계가 되고 싶다는 갈망이고,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이다. 애써 말을 골라가며 글을 쓰지만, 틀림없이 여기에도 잘못된 표현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보면 부끄러운 단어를 썼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더 이야기해야 한다. 이거 좀 이상하다고, 이게 더 낫다고 알려주고 고치는 것이 지금보다 덜 민망하고 덜 공격적인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고 듣고 읽고 쓰면서, 세계와 친절하고 다정한 관계를 맺어가려 애쓰다 보면, 조금 더 평등해진 언어를 만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위에서 예를 든 군 부대에서는 사실 '충성' 대신 그 부대만의 구호를 사용하도록 했는데, 그러면 좀 덜 어색한 표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부대 특정이 쉬워질까 걱정돼서 굳이 충성이라고 바꾸었다. 하여간 지금은 안 그러길 바란다.
언어 사용과 정치경제학적 현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김주관(2012), 언어는 평등한가? - 언어 사용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 인문논총67'을 참고할 수 있다.
라보프와 트루질의 연구에 대해서는 '황선혜(2004), 계층별 언어 변이, 새국어생활14(4)'를 참고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사회언어학 관련 저술에서 인용된다.
2008년 국민의 기초 문해력 조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김순임(2009), 2008 국민의 기초 문해력 조사 개요, 새국어생활19(2)’를 참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