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이런 도시가 있었으면, 참 좋겠네.
http://o-heje.com/project.php?project_no=7
_이 글은 '오헤제건축사사무소'의 研究. PARTS OF LIFE 연구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되었다.
‘스토리’가 없는 ‘우리 동네’?
내가 계속 살아온 제주 본가의 동네, 노형동에 가면 나는 바빠진다.
눈도장 찍을 가게들이, 가게 사장님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 오랜만에 제주집에 가면 물어볼 게 많다. 00은 요즘 어떻게 지낸대? 00은 군대 제대했으려나? 00아저씨/00아줌마는 여전히 거기서 일해? 등.
절대 아빠가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 반찬이 보이면 나는 안다. 00엄마가 만들어서 준 것이라는 것을.
커피원두가 떨어지면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집 앞에 있는 커피원두 가게에, 일명 ‘원두아저씨’께 가서 원두를 사 온다. 가끔 필터가 떨어지면 필터도 함께.
급하게 책이 필요하면 초등학생 때부터 단골인 서점에 전화를 걸어 확인한다. “00예요(본인). <00> 책 있어요?”. “응, 있다~ 와라~”라고 답하면 그냥 가서 나를 알아보는 서점 사장님께서 알아서 책을 주시며 계산해 주신다.
2024년 한국에 이런 정겨운 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신기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떤 한 곳에 정착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소소한 연결고리들을 연결하는 것과 동의하다. 그리고 사실은 나와 그 어떤 연결고리(사적으로)가 없는 집,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어느 기간 살다 보면 인사조차 해본 적이 없더라도 왠지 언젠가 이야기를 나눠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하지만 신기하게 한국에서는 이러한 스토리와 연결고리가 느껴지는 곳이 외국에 비해 눈에 띄게 적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생 월급쟁이로 살아도 못 모을 돈을 호가하는 그 화려한 아파트들도 타인의 눈에는 그냥 아스팔트 덩어리로 보일 뿐이다.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 동네’가 주는 그 따스함과 정을 주지 않으며 어쩔 땐 나와는 너무 먼 존재로 보여서 외로움/무기력감까지 줄 때도 있다.
실제 본가인 노형동이 아닌 곳에서, ‘우리 동네’를 찾을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집은 어디인가?
를 20살 제주를 떠나 육지에서 살게 되면서 가장 많이 혼자 생각해 봤었다. 한국에서는 부산, 서울, 이 두 곳 밖에 살아보지 못했지만 단 한 번도 ‘우리 동네’라고 말하고 싶었던 동네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작년 처음으로 일본에서 1년간 살아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우리 동네’라고 자연스럽게 부르게 되는, 따뜻하면서 귀여운 동네에서 운이 좋게 살아보았다.
‘오헤제건축사사무소’의 소장님 두 분 께서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진행했던 프로젝트, < 研究. PARTS OF LIFE>를 읽다 보면 ‘생활감(生活感)’이 상당히 중요한 단어로 나온다.
“과거에는 집을 통해 사람의 생활감이 표현되었다. 밥을 지으면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하고 한 가정의 생활감이 집 안에서 뿐만 아니라 마을로 뻗어나가 있었다.
근대 이후 가정의 생활감은 건축설비에 흡수되어 개인의 생활감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일상생활 중에 자연스럽게 만나던 장소가 함께 사라졌다.”_본문
일본어와 한자를 잘 알지 못해도 한국 사람이라면 이 단어를 읽자마자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본어를 아는 나에게는 그 의미가 더 생생하게 와닿았다. 여기 바로 그 생활감을 아주 고유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보여주는(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곳이 일본의 주택가라고 생각했다. 일본에 1년간 살아보면서 정말 많은 주택가를 가봤고 내가 생각하는 ‘생활감’을 가장 보여주는 요인은 ‘얼마나 그 본인의 생활의 모습을 노출/공유하는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점은 오헤제 사무소 소장님들의 연구 설명글과도 거의 동일하며 크게 동의하는 바이다.
예를 들면, 빨래. 건조기가 필수 가전이 된 한국과 다르게 일본은 거의 대부분 밖 베란다에 옷을 건조한다. 사실 여름에 그렇게 습한데, 왜 아직도 꿋꿋이 밖에서 옷을 말리는 것을 고집할까 의문이긴 하지만. 아무나 볼 수 있는 그 집 베란다에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들의 빨랫감을 거의 매일(가족이 많은 경우엔 빨랫감이 많으니) 널어 내버려둔다.
일본에 살 때 나는 동생과 학교 근처 맨션(빌라)에서 살았었는데 3층에 살았다 보니 바로 옆 3층짜리 개인주택에 사는 아주머니와 빨래를 널면서 마주친 적이 꽤 많았었다.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옆에 사람이 살기는 하는구나, 여기는 몇 명이 사는 집이려나?라는 의문도 들고. 이상한 말이지만 진짜 사람 사는 곳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집주인분들의 취향을 가득 담은 명패, 화분, 도자기인형, 장식품 등. 취향을 그대로 전시해 놓은 듯한 집의 파사드랄까, 정원이랄까. 그 특유의 외관이 개인적으로 참 좋았다. 사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일본은 ‘취향’에 진심인 나라이다.
다들 본인만의, 특유의 취향이 있으며 그 취향이 아무리 괴상(?)하고 비정상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표현한다. 거의 획일화된 미의 기준, 획일화된 ‘올바른’ 취미/취향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자라온 나에게는 가장 일본 사회에 대해 부러웠던 점이었다.
동시에 그 취향을 어떤 방식으로든(하다 못해 책가방 인형고리로라도!) 표현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는 일본의 주택에서도 보인다.
주택가를 걷다 보면 이 집주인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어떤 양식을 좋아하는지가 보여서 동네 산책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도쿄의 작은 주택들이 모여 있는 길에서는 빨래, 화분 등 개인의 물건이 밖으로 쏟아져 나와 있거나, 그것을 둘러싼 장치의 풍경을 통해 사람의 기미, 생활감이 느껴지고, 밖으로 나와있으므로 일정의 공공성을 가지고 있다”_본문
글을 쓰다 보니 여기서 작가님이 말하고자 하는 생활감은 ‘스토리’라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공유해 주는 새로운 형식의 SNS라고나 할까.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생활감은 소위 말하는 동네의 ‘사람냄새’ 나게 하는 요인임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새로 이사 온 서울집 동네는 그 스토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모두 본인이 어떻게 사는지, 프라이버시라는 이름의 벽을 두고 가리기 바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건축을 공부하면서 많은 교수님, 학생들이 프라이버시를 위한 것이라며 가리고 가린, 마치 감옥과 같이 무거운 모습의 건축을 긍정적으로 지향하는 경우를 봐왔다. 그리고 단순히 가리는 것을 넘어서 한국은 특히 한 건물에도 몇십대가 넘는 CCTV를 설치하면서 ‘여기는 내 소유요’라고 선언하고 있는 건물투성이다. 이 점이 한국 특유의 높은 치안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이웃과 반찬, 과일 등을 주고받는 사회에서 자라온 나에게는 이곳이 꽤 팍팍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프로젝트에서 다시 살리고자 했던 생활감을 도쿄같이 한국 대도시에서 다시 보기에는 우리는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생활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건축가들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지금 건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생각해 보면 좋을 주제를 오헤제 건축사사무소의 프로젝트 덕분에 다시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