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5일 금요일
분수 (그린/ 골드)
by Redsmupet Dec 25. 2020
Keynote : 자아의 깊은 곳으로부터 가장 깊은 기쁨이 솟아오를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드는 가슴으로부터의 지혜
Affirmation : 나는 모든 두려움과 걱정을 놓아버린다. 가슴 안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빛에 나를 연다.
주말마다 수원에서 강릉으로 운전을 하며 다닌 적이 있었다.
운전면허를 따고 한참 동안 운전할 생각을 안 했다. 운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순전히 여행 때문이었다. 오키나와 여행. 렌터카를 몰고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차를 샀다. 500만 원짜리 중고차. 동생이 운전 연습을 도와줬다.
"언니 같은 사람은 운전하면 안 돼. 민폐야."
이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꿋꿋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을 하는 것 자체가 민폐였던 사람은 무사히 오키나와 여행을 다녀온다. 다행히 그곳 사람들은 아주 친절했다. 실수를 해도 웃으며 알려주고 기다려줬다. 그곳에선 모든 차들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운전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여기는 거기와 달랐다. 도로에 나서자마자 전쟁이었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경적소리가 나에게 "너 여기서 나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서러움이 쌓여갔다. 초보운전이라고 붙여놓은 종이를 떼어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마저 없으면 완전 무법천지에 맨몸으로 나가는 것 같아 단단히 붙여놓았다.
몸으로 하는 일이 좋은 건 익숙해짐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몸으로 하는 일은 언젠가는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더 좋은 건 머리가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스스로 배운 걸 까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운전이 몸으로 하는 일이라 다행인 게 이런 거다. 운전에 익숙해진 나는 주말마다 수원에서 강릉까지 고속도로를 신나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겁 없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차가 싫어졌다. 사람들이 왜 좋은 차를 갖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잘 구분되지 않을 때가 있다. 엑셀레이터를 밟지도 않았는데 속도가 올라갈 때 내리막길인가 보다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엑셀레이터를 밟아대도 속도가 줄어들기만 할 때 오르막길에 들어섰다는 걸 알게 된다. 오르막길, 이것 때문에 내 차가 싫어졌다. 나의 500만 원짜리 차는 십 년 된 엑센트였다. 횡성휴게소 부근에서 시작되는 오르막길에서 신나게 속도를 내던 차가 갑자기 느려지기 시작한다. 빨리 달리겠다며 일 차선을 고수하다 나보다 속도가 빨라진 차들의 눈치를 보며 2차선, 3차선, 점점 바깥 차선으로 밀려난다.
"빨간색 페라리가 갖고 싶어!"
그게 뭐라고, 다른 차보다 속도를 낼 수 없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바깥 차선으로 밀려나는 게 꼭 세상이 나를 밀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빨간색 페라리만 있으면 내가 다시 1차선, 세상의 중심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운전을 하면 사람이 이렇게 유치해질 수 있는 건가?
오늘 아침 명상을 하는데 갑자기 그때가 생각났다.
나의 첫 차, 500만 원짜리 엑센트에게 했듯이 내가 나를 닦달해온 것 같았다. 나에게 너는 왜 페라리처럼 못 달리냐며 1차선에서 달리는 저 차들을 보라고 다그쳐온 것 같았다.
"내 속도대로 갈래."
내 안에서 올라온 말.
내가 차를 샀던 건 카레이서가 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자유를 갖고 싶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 언제든 출발하고, 멈추고, 그리고 머무를 수 있는 자유를 자동차가 가져다줄 수 있을 것 같아 차를 샀던 것이다. 내가 삶을 사는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내 삶이 질주하길 바라지 않는다. 자유롭게 유유자적 흐르길 바란다. 그런데 어쩌다 속도에 홀려버린 거지?
걸을 때 보이던 것, 자전거를 타면 그걸 놓쳐버린다.
자전거를 타며 즐기던 것, 차를 타면 그걸 잊어버린다.
천천히 차를 몰 때면 보이던 것, 속도를 내면 점점 시야가 좁아지면서 사라진다.
지나쳐 가려고 사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많이 지나쳐버렸다.
다행이다.
지금 잠시 정차 중일 때 알아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