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25일 월요일

머리는 천상에 발은 지상에 (바이올렛/ 레드)

by Redsmup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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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note : 자신의 봉사를 수행하는 에너지를 제공하면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자아를 균형 잡고 지원한다.

Affirmation : 나는 내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내 존재의 중심을 신뢰합니다.


눈에 보이는 빛의 스펙트럼 양 끝에 놓인 레드와 바이올렛, 사실 바이올렛은 레드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레드에 블루가 섞일 때 바이올렛이 되기 때문이다. 온통 붉은 것 속에 푸름이 섞여들 때 바이올렛이 된다. 레드를 바이올렛으로 변하게 만드는 푸름이란 무엇일까?


오늘 나에게 레드는 새빨간 욕망으로 다가왔다. 진짜를 살아보고픈 욕망, 흐리멍덩함을 벗어버린 생의 욕망이 나에게 빨간빛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해'라며 망설이던 걸 '그게 내가 하고 싶었던 거야'라고 말하는 하루, 오늘이 그랬다. 이리저리 잴 때는 몰랐다. 이런저런 포장지로 욕망이라는 놈을 그럴듯하게 포장해놓았거든. 그 포장지를 다 벗겨내고 알맹이만 남으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스마트 스토어를 해볼까 말까 망설였다. '장사'라는 말이 왠지 나에게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망설였다. 내가 너무 속물 같아 보일까 봐, 지금 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돈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보일까 봐 나의 욕망에 포장지를 하나라도 더 씌우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스마트 스토어를 개설하고 상품을 올리기 시작하니 재미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상품을 올리는 일에 몰두하는 나를 본다. 웃긴 건 그런 나를 볼 때마다 올라오는 생각이다.

'뭔가 더 중요한 걸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을 엉뚱한데 써버리고 있는 게 아닐까?'


'정말 중요한 것'이 대체 뭐길래? 정말 그런 게 있긴 있는 걸까? 실체를 확인할 길 없는 이 걱정은 나와 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오고 있다. 나의 모든 결정을 감찰해오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감찰이 느슨했던 것일까? 뜬금없는 생각이 튀어 올라왔다.


'맞아~ 언젠가 나도 사업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언젠가 나의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의 시작은 아마 타로점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래전이었을까? 기간제 교사로 일하면서 대학로에서 자취를 하던 때였다. 퇴근길에 타로점을 치는 노점으로 들어가 앉았다. 1년짜리 기간제 교사, 가을이 되면서 진로를 고민하던 차였다. 나의 진로에 대해 타로점을 봤다. 임용시험을 볼까, 사립학교에 지원을 해볼까 고민하던 나에게 타로점을 봐주던 이가 사업을 해보란다.

'사업?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나 같은 사람도 사업을 할 수 있나?'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길,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감히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괜히 겁이 났다. 머쓱해진 마음에 쓸데없이 돈만 버렸다고 투덜대며 집으로 향했다. 겉마음과 속마음이 달랐던 것일까? 그날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씨앗인지도 모르고 내버려 뒀던 씨앗 하나가 싹을 틔웠다.

언젠가 정말 나도 내 사업을 해볼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지금 내가 하는 일 중에 뜬금없는 건 하나도 없다. 언젠가 한 번쯤은 꿈꿨던 일, 상상했던 일 속에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존재한다. 어떤 일 앞에서는 꿈만 꾸던 일이 현실이 된 게 기적이라 기뻐한다. 신기해하기도 한다. 어떤 일은 무언가를 함부로 바래서는 안 되겠다는 두려움을 불러오기도 한다.


우연이 아닌 필연, 필연의 색깔이 파란색이 아닐까? 우연한 충동이라 여겨지는 나의 새빨간 욕망이 사실은 파란 빛깔의 필연을 동반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이 파랑은 참 신기하기도 하지. 파란 빛깔의 필연을 알아채기 전까지는 빨강 뒤에 숨어 그 빛이 보이질 않으니 말이야. 그저 새빨간 줄만 알았던 욕망이 실은 나의 과거 속에 이미 싹을 틔운 씨앗이라는 걸 알아채는 순간 파란빛과 뒤섞여 바이올렛이 되어버린다. 비로소 제 빛깔이 된다.


이틀 전 꿈에서 나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돌보고 있었다. 어찌나 활기찬지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우유를 먹여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 아기를 침대에 눕히고 말했다.

"여기 가만히 누워있어. 금방 맘마 가져올게."

알았던 거다. 그 애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걸. 한 발짝 떼기도 전에 아기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뒤뚱거리며 걷는다.

'맙소사!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렇게 걸으면 안 되는데.'

얼른 아기를 품에 안았다.


꿈에 아이가 나오면 그건 그 나이 때의 나이거나, 그 아이의 나이만큼 돌아간 과거의 어느 시점에 새롭게 시작된 나의 무엇이다. 이틀 전 꿈에 나온 아이는 요 몇 달 사이 나에게서 새롭게 시작된 무엇일 테다. 아이를 키우는 일, 신뢰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마냥 위태로워 보이기만 하는 아이를 믿고 지켜보기란 쉽지 않다.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기보다는 마냥 안고 있는 게 속편 하다. 그 아이는 나의 욕망일까?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욕망, 어쩌면 그건 나의 나침반이 되어줄 직관일지도 모르는데 마냥 믿고 내맡기기가 쉽지 않다. 어쩐지 위태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아이를 계속 안고 있을 수만은 없다. 아이가 온전한 존재로 성장하려면 울타리가 넓어야 한다. 아이에게 직접 세상을 만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신뢰와 방임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을 때 아이도 나도 행복할 수 있다. 둘 다 성장할 수 있다. 지금 나와 나의 욕망, 혹은 저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충동도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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