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라리온(페일 그린)
나 "길을 찾지 못하겠어."
간호사 "지금은 길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어두운 심연으로 내려간 칼 융의 세 번째 밤, 스쳐 지나가는 문장들 중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마음에 머무는 구절. 융이 하는 말이 내가 하는 말이어서일까?
"길을 찾지 못하겠어."
내가 만난 많은 이들은 길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 표지판을 가리켰다.
"저기 저렇게 도로 표지판이 있잖아. 표지판만 보고 따라가면 되는걸 뭘 헤매!"
그랬으면 좋겠는데 내 마음은 자꾸만 나를 도로 밖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참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미쳤어?"
내가 하는 대부분의 선택에 따라오던 말, 미쳤냐는 핀잔과 한숨. 마음이 시키는 일이라는 건 매번 그랬다. 내 마음이 정말 미친 걸까? 두려워진 나는 어떻게든 표지판을 따라 길을 가려고 애를 썼다. 죽도록 애를 써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나는 도로 밖 어딘가에 서 있었다. 도로 바깥으로 걷는 게 꼭 유쾌한 일만은 아니었다. 사서 하는 고생, 흔한 말로 하지 않아도 될 개고생, 도로 밖에서 그걸 참 많이 경험했다. 후회, 비참함, 절망 같은 것들도 그곳에 산재해 있었다.
누군가 친한 이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그냥 평범하게 살면 안 돼? 평범하게 살면 큰일이라도 나는 거야?"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사람들이 '평범' 혹은 '정상'이라고 여기는 범주 안에 살면 조금은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나의 마음, 나의 열망은 나를 엉뚱한 방향으로 데리고 갔고 세상이 평범하다고 말하는 틀에서 벗어나 개고생을 하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했다. 마흔이 넘어가며 그런 나를 굳이 바꾸려들지는 않게 되었지만 마음 한편에 여전히 불안이라는 놈이 버티고 있었다. 무언가 그놈을 자극하기라도 하면 불안이라는 놈은 엄청난 독설가가 되어 나를 공격했다.
오늘, 그놈이 강적을 만났다. 나에게는 희열을 느끼게 해 준 우군.
융의 어두운 심연, 세 번째 밤에 나타난 그의 영혼은 말한다.
삶 자체엔 규칙이란 것이 전혀 없어. 그것이 삶의 신비이고 미지의 법이야. 네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삶에 강요하려는 시도야.
칼 융, 레드북, p.256
내 말이!!!!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세상의 질서에 따르라고 말하는 이들이 너무하는 거야. 세상이 카오스인걸 인정하는 게 너무 두려워서 그걸 감추려고 질서를 만든 이들, 그들의 두려움을 나에게도 옮기려는 거잖아.
괜히 쫄아 있었어. 질서는 카오스의 두려움을 피하려는 이들의 필요로 만들어진 거지 진리가 아닌데 말이야.
이제는 쫄지 않고 마음껏 나의 카오스, 나의 혼돈을 살아봐야겠어. 가지런한 발자국만 예쁘라는 법 있어? 여기저기 정신없이 찍히는 나의 발자국도 나름의 멋이 있잖아.
그동안 너무 쭉 뻗은 길만 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의 길은 다른 모양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직선만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선의 도로를 찾고 있는 것이라면 길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간호사의 말이 맞다. 그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니까. 내 삶의 방식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