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11일 목요일

세라피스 베이 (클리어/ 클리어)

by Redsmupet

Keynote : 고통에 대한 이해. 빛의 힘을 통한 정화.

Affirmation : 나는 신과의 약속을 상기하면서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나의 사주를 보고 가끔 조언을 해주시는 분이 계시다. 흘리듯 가끔 해주시는 말씀이 감질나서 아예 내 사주를 제대로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하루 만에 답변이 돌아왔다.

내가 천재란다.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사주 상으로는 분명 천재란다.

그분의 말씀이 맞다면 나는 바보인 거다. 타고난 것도 못 꺼내 쓰는 바보.

천재와 바보는 한 끗 차이라더니 그 말이 역시 진리인 건가?


천재의 운명으로 태어나서 어쩌다 바보로 살고 있을까?

그분 말씀을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돌멩이 때문이란다. 내 생에는 돌멩이가 쓸데없이 너무 많단다. 가는 길마다 돌멩이가 널려 있단다. 어느 길로든 좀 가보려고 하면 얼마 못 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란다. 이건 맞는 말이다. 내 인생에는 정말 돌멩이가 많아도 너무 많다. 돌멩이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괜찮은 척, 안 아픈 척 참다가 결국 병이 나기도 했다. 화병, 우울증, 공황장애, 뭐 이런 것들.


"아우토반을 달려야 할 슈퍼카가 논두렁을 기어가고 있으니 그 속이 오죽할까?"

나의 사주를 보며 탄식을 내뱉는 타인 앞에서 기분이 묘해졌다. 너무 묘해서 그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야 그 기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아우토반을 달리고 싶은가?

달리고 싶어.

그러면 차가 나가지 못하게 길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돌덩이를 만날 때마다 화가 나?

전에는 그랬지. 오죽하면 화병이라는 진단을 받아봤을까, 오죽하면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1년여를 집에 콕 박혀서 잠만 잤을까. 그런데 참 이상해. 지금도 어렵지 않게 내 길을 가로막는 돌멩이와 마주치거든, 그런데 화가 나질 않아. 아니지. 전혀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화가 나기는 해. 그런데 화의 강도와 지속시간이 약해진 것 같아. 화로 채워졌던 자리를 다른 무언가가 채웠어. 호기심!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하려다가 결국에는 포기하잖아,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더라면 정말 큰 일 났겠구나 싶은 일들이 하나 둘 쌓이더라고. 화가 줄어든 자리를 호기심이 채우기 시작했어. 왠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언제부턴가 아무리 용을 써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는 내가 원하는 게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그리고 이 생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고 이렇게 큰 돌덩이로 길을 막고 있나 궁금해졌지.


내 사주에 내가 이 생에 온 이유, 그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묘해진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뭘 하든 하는 족족 돌멩이에 차여 넘어지는 천재의 생. 내 입으로 천재라고 말하는 건 좀 우습지만 어쨌든 천재라니까. 이런 생을 내가 선택한 것이라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싶었던 것일까? 왠지 내가 찾는 답에 한발 다가선 것 같아 묘한 흥분과 긴장이 느껴졌다. 바로 어젯밤이었다.


오늘 아침 투명한 빛깔로 가득 찬 바틀이 유난히 반짝였다. 그 빛깔로 명상을 하며 떠오른 옛 장면 하나가 전날 밤의 생각을 이어줬다.

어렸을 적 피아노 콩쿠르를 나간 적이 있다. 피아노를 치는 내내 내 피아노 소리가 어찌나 마음에 안 들던지,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금상을 받았다. 좋아하면 될 일을 꼬마는 자신이 받은 상이 너무 찜찜했다.
'나는 자격이 없어.'

그때 그 꼬마의 마음을 가득 채우던 말.

내 인생의 가장 큰 돌멩이는 나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못한 채 내가 가는 길마다 여긴 나의 길이 아니라며 돌멩이로 막아 놓았는지도 모른다.


평생 나를 따라다니던 질문,

"내가 과연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가?"

이 질문에 둘러싸인 나의 세상은 온통 내가 만든 돌멩이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래 놓고 누구냐고, 누가 멀쩡한 길에다 이렇게 돌멩이를 쌓아놓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며 살아왔다.

다행이다. 이제는 돌멩이를 봐도 그만큼은 화가 나지 않아서. 화가 사라진 자리를 호기심이 채워서. 그 호기심 덕분에 범인이 나라는 걸 알았잖아?

아직 수수께끼를 다 풀지는 못한 것 같지만 이 정도면 첫발은 꽤 잘 내디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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