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역인 나에게 처음으로
대사는 없지만 꽤나 긴 지문이 주어졌다
액션!
딸깍, 현란한 손놀림에 화병의 뚜껑이 날아간다
깊이도 끝도 그 크기도 가늠할 수 없어 두려운
시간이 지나도 삭지 않고 날것 그대로인
지독한 화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는다
살냄새로부터 격리되고
철저히 따돌려진 혼자됨으로
시비걸 이성도 떠난 뒤라
타인의 꿈을 짓밟지 않고도
온 밤을 내맡길 수 있다는 안도 속에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넣는다
꿈틀거리는 혓바닥으로
발가벗긴 몸뚱이 유린하고
날카로운 송곳니로 질긴 염통을 뜯으며
행여 포식에 방해가 될까
하늘도 땅도 목 졸라 두고
피도 숨통도 끊어 놓았다
기억할 자가 뒤바뀐, 너로 인한 이 격랑
찢겨 갈기갈기 내동댕이쳐진
아직 파닥거리는 살점들 마저 뜯기려
게걸스럽게 새벽을 내달린다
쓰러진 화병들 앞에
눈구멍 뚝뚝 화를 쏟는다
목구멍 헉헉 화를 토한다
오케이 컷!
초대장 받은 단역이다
불이 꺼지고
바들바들 막이 오른다
통째로 끊겨나갔다
엔딩 크레딧... 에도 없다
요즘 들어 심심치 않다
체념? 초대장 받을 주연이다
막이 내린다
불이 켜진다
익숙한 현장이다
나의 진가가 발휘되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조연을 맡았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살아야 해서
감독은 나를 배우의 길로 이끌어 주었고
스스럼없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어렵지만 꽤 친분이 있는 분이다
시간이 촉박하다
시작이다
감독의 손이 내 등을 후려친다
악쎤! 회사 안 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