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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 보석 Mar 24. 2021

5.2 파죽지세

제5장 : 이이제이



5.2 파죽지세



  소들은 작전대로 방우의 지휘 아래 일제히 용팔이네 보리밭으로 ‘쿵 쿵 쿵’ 달려갔다. 


  용팔이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서 내일은 추수하려고 트랙터를 빌리고 일꾼을 사놓은 상태였다. 


   “얘들아, 너무 서두를 것도 없다. 그냥 발로 밟고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 방우가 무리하지 말 것을 강조하면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래, 이를 우리는 ‘식은 죽 먹기’라고 하지!”

  “맞아, 인간들은 누워서 떡 먹기’라고도 하던데……. 음 메에~”

  “그래, 오늘 공기 좋은 이곳에서 운동 한번 제대로 해보자. 아~ 기분 좋다.”


  방우의 지시에 따라 신나게 몰려다니며 한 시간도 안 걸려서 보리밭 천여 평을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초토화했다. 참새들이 위에서 박장대소(拍掌大笑)하며 응원하고, 떼로 달려들어 땅에 쓰러진 보리의 떨어진 낟알을 먹어 치웠다. 그것은 그동안 인간들에게 쌓였던 분노의 몸부림이었다.

*파죽지세(破竹之勢) 대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으로, 적을 거침없이 물리치고 쳐들어가는 기세를 이르는 말.

  깜짝 놀란 청년들이 소를 쫓아 보리밭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기고만장(氣高萬丈)한 소들의 위세에 눌려 어쩔 줄 몰라하다가 오히려 소들의 반격에 뿔에 받히고 발굽에 짓밟히자 들고 있던 몽둥이도 내던지고, 모자가 날아가고, 신발이 벗어져도 챙기지도 못하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줄행랑을 쳤다. 

*기고만장(氣高萬丈) 일이 뜻대로 잘될 때, 우쭐하여 뽐내는 기세가 대단함. 펄펄 뛸 만큼 대단히 성이 남.


  다음에는 작전대로 칠뜨기네 보리밭을, 그다음엔 김만수네 보리밭을, 그다음에도 이어서 계획대로 모두 짓밟아나갔다.


  일진광풍(一陳狂風)이 몰아치듯 격렬한 전투로 보리밭을 초토화한 소들은 옆에 있는 채소밭의 배추를 뜯어먹어 배를 채우며 잠시 쉬었다.

*일진광풍(一陳狂風) 한바탕 부는 사나운 바람


  “그런데 보석이 그 나쁜 놈은 어찌 되었냐?”

  “응 아까 구급차 3대가 와서 보석이와 용팔이, 칠뜨기를 싣고 가던데…….”

  “나쁜 놈들! 자칭 만물의 영장이랍시고, 동물의 생명권이나 행복권은 아예 생각도 않는 놈들이니 이렇게라도 혼내줘야지.” 당우가 기분이 우쭐해진 듯 어깨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러게, 그놈들 이제 다시는 총은 못 쏠 것 같던데…….”

  “그것 잘 되었네. ‘뿌린 대로 거둔다’라고 제 놈들이 죄지은 대가를 제대로 받은 거지.” 

  “당우님, 그런데 사실 보면 용팔이와 칠뜨기, 그리고 총은 우리 소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 아닌가 유?” 무슨 일이든 참견하기 좋아하는 견우가 끼어들어 말했다. 듣고 보니 그렇긴 하다.

  “그래도 우린 이번에 그들과 동맹을 맺고 <동물 연합군>으로 참여했으니 우리가 맡은 소임을 다해야지.” 당우가 명분을 내세우며 그렇게 대답했다.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고 친구끼리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네. 동맹을 맺었으니 이제 우리는 그들과 친구나 다름없는 사이지.” 대장 와우가 문자를 써가며 아는 체를 했다. 

  “친구요? 호 호 호. 참새가 우리하고 친구라고요? 그 작은놈들이? 그놈들이 그동안 우리를 얼마나 놀려먹었는지 잘 아시잖아요.” 철없는 견우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떠들었다.

  “네 이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그게 어디서 배워먹은 태도냐?” 방우가 구상유취(口尙乳臭) 나는 어린 게 뭘 아느냐고 큰소리로 역정을 내었다. 


*붕우유신(朋友有信) 오륜(五倫)의 하나. 벗과 벗 사이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이른다.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이 유치함을 이르는 말.   


  그러나 생각해 보면 참새가 소에게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자격지심(自激之心)이 들었다. 뭔가 참새에게 이용당했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걸 인정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일은 작게는 아버지에 대한 원수를 갚는 것이고, 크게는 그동안 교묘하게 속인 인간들에게 복수하는 것이요, 더 나가서는 <동물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해석하고 자위했다.


*자격지심(自激之心)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미흡하게 여기는 마음.

*아전인수(我田引水) 자기 논에 물 대기라는 뜻으로,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


  “그런데 이번 일로 인간들이 화가 나서 우리를 해코지하려 들면 큰일 아닌가요?” 눈치 없는 초우가 걱정되는 얼굴로 또 물었다. 다른 소들도 그게 걱정이란 듯 큰 눈을 고정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하하하, 얘들아 그건 전혀 걱정할 게 없단다. 우린 몸값이 워낙 비싸서 인간들이 아무리 화가 나도 우리를 어찌하지 못한단다. 너희들 ‘재산목록 1호’라고 들어 봤냐? 우리가 인간들에게는 ‘재산목록 1호’란다. 집에서 제일 비싼 우리를 함부로 대한다면 누가 손해를 보겠느냐?” 


  당우가 의기양양(意氣揚揚)해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젊은 소들은 어른들 앞에서는 말을 못 하고, 돌아서서 와우님이나 당우님도 늙더니 이제 판단력이 흐려진 것 같다고 수군댔다.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이유를 대며 자위하던 당우는 젊은 친구들 반응이 신경 쓰였다. 세대 차이를 절감하면서 전에 우리 어릴 땐 저렇게 당돌하게 굴진 않았는데 하며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허무맹랑(虛無孟浪) 터무니없이 거짓되고 실속이 없음.

*격세지감(隔世之感) 오래지 않은 동안에 몰라보게 변하여 아주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느낌.



  젊은 친구들 기분을 풀어 줄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마침 옆에 있는 수박 비닐하우스가 보였다. 



  “얘들아! 전쟁하느라 고생했으니 전리품도 좀 챙겨야 하지 않겠니? 지금부터 저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수박과 참외는 다 너희 것이니 마음대로 실컷 먹어라.” 


  애초 작전 계획에 없었지만, 명령이 떨어지자 소들은 일제히 비닐하우스로 달려갔다. 목이 마른 소에게 이보다 좋은 진수성찬(珍羞盛饌)은 없었다. 그동안 인간들은 수박과 참외의 껍질만 던져주고 먹으라 했었다. 가끔 골이 상한 참외를 통째로라도 줄라치면 감지덕지(感之德之)해서 먹었었다.


*진수성찬(珍羞盛饌) 푸짐하게 잘 차린 맛있는 음식.  

*감지덕지(感之德之) 분에 넘치는 듯싶어 매우 고맙게 여기는 모양. 

 

  커다란 수박을 발로 한 번 밟아서 깨니 먹기 좋은 크기로 쪼개졌다. 싱싱한 수박 쪼가리를 입에 물고 씹으니 사이다 맛은 저리 가라다. 다음엔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노란 참외를 한입에 왕창 깨물어 먹으니 꿀을 한 사발 퍼마시는 기분이었다. 

  지상천국(地上天國)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전설로 듣던 조상들이 인간과 친하게 지내기 전에는 이런 세상이 있었다고 들었다. 다만 호랑이 같은 맹수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인간과 친해지면서 가축이 되어 사육당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지상천국(地上天國) 이 세상에서 이룩되는 다시없이 자유롭고 풍족하며 행복한 사회)를 말함 


  내가 볼 때, 소가 가축으로서 인간과 친하게 지내지만, 본능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는 게 인간들이 송아지를 길들이려면 코에 구멍을 뚫어야만 가능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하나, 야생 포유류는 태어나면 바로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데 송아지도 태어나서 어미가 태반만 입으로 제거해 주면 곧바로 뛰어다니는 걸 보아도 그 본능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주는 평화와 안전을 담보로 본능을 감추고 사는 것이다.

  와우님 얘기로는 불과 삼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소죽 쑤어주고, 들에 나가서 싱싱한 풀도 뜯게 해 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논과 밭에서 쟁기질, 써레질하느라 고된 일과를 보내곤 했다고 회상하시곤 했었다. 할아버지는 마차에 물건을 가득 싣고 읍내까지 삼십 리 길을 땀 흘리며 걸어보지 않은 소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며, 지금이 그때보다는 먹는 것도 배불리 먹고 일도 하지 않으니 편하게 사는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일 년 내내 밖에 한 번 나가보지 못하고 사는 감옥 같은 삶에 대하여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넓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며 싱싱한 풀을 뜯어먹는 경험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그동안 격렬하게 뛰어서 목이 몹시 말랐는데 수박과 참외를 먹고 갈증이 해소되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모든 걸 다 잊고 매일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유와 풍요 두 가지가 거기에 있었다. 


  ‘웃는 자가 있으면 우는 자가 있다.’라는 게 세상 이치다.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그 광경을 애가 타서 지켜보던 수박 비닐하우스 김 씨네 아줌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고 울었다.


  “이번 주에는 첫 출하를 하려 했는데 저놈의 소들이 다 뭉개 놓네. 아까워서 어쩌나! 내 수박 다 망가졌네! 이 일을 어쩔꼬? 나는 이제 망했네. 우리 아들 대학교 학자금 마련하려고 그 고생해서 키웠는데 어찌할꼬!”

  “이장님! 어떻게 좀 해 보세요. 이렇게 소한테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나요?” 옆에서 지켜보던 청년이 안타까운 마음에 이장에게 말했다.

  “허허, 글쎄 나라고 별수 있나? 자네도 보다시피 저렇게 지금 소들이 미친 듯이 날뛰는 데 난들 뭘 어찌할 수 있나?” 팔짱을 끼고 넋을 잃은 듯 바라만 보던 이장 오만상이 오히려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잖아 유~”

  “시청이나 하다못해 파출소에 신고라도 해야 안 되겠어 유?”

  “시청에야 벌써 신고했지만, 그 사람들이라고 뭔 별수가 있나?”

  “그래, 뭐라고 하는 디 유?”

  “곧 나와 볼 테니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만 하더구먼.”

  “파출소에는 유?”

  “파출소에 말해봤자 총 갖고 와서 소를 쏴 죽이는 건데 저 비싼 소를 쏴 죽일 건가? 그거야말로 교각살우(矯角殺牛) 아닌가!”

  “하긴, 그렇긴 하네 유~” 


*교각살우(矯角殺牛) 소의 뿔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는 뜻으로, 잘못된 점을 고치려다가 그 방법이나 정도가 지나쳐 오히려 일을 그르침을 이르는 말.


  한마디로 대책이 무대책,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다치면 나만 손해이니 경거망동(輕擧妄動)해서 함부로 나설 일도 아니었다. 그저 소의 자비로운 처분만 기대하며 기다리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다.



  양계장을 뛰쳐나온 닭들은 작전 계획에 따라 보석이네 텃밭 채소부터 짓밟기 시작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입으로 채소 잎사귀를 뜯어먹으며 발 갈퀴로 줄기를 할퀴기만 하면 되었다. 연한 채소들은 갈가리 찢기며 초토화되어 갔다. 닭들이 200평이 넘는 텃밭의 채소들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데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얘들아 여기 먹을게 지천이다. 아침을 배불리 먹어두어야 오늘 전쟁을 제대로 치를 거야!” 방닭이가 잠시 쉬면서 배를 채울 것을 지시했다.

  “야~ 신난다!, 맨날 인간들이 먹고 버리는 푸성귀만 먹었는데 이렇게 싱싱한 채소를 먹으니 정말 맛있네!” 계닭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상치에 쑥갓, 시금치, 배추, 파, 아욱  등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채소가 없는 게 없네!” 이번엔 계숙이가 흥분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맞아 인간들은 자기들은 좋은 것 다 먹고 남은 쓰레기 같은 푸성귀만 우리에게 주었네.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주인님 감사합니다.’하면서 고마워했지. 이제 인간들이 우릴 고마워하는 날이 올 거야.” 청닭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그동안 속고 살은 걸 생각하면 너무나 원통한데, 그런 비참한 삶을 면하려면 오늘 전쟁은 기필코 승리해야만 할 거야.” 이번엔 호닭이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옛날 우리 조상님들은 조물주로부터 높은 벼슬을 받고 대우받으며 살았는데 어쩌다 우리가 이런 신세가 되었나!” 한탄하는 소리가 무리 속에서 나지막하게 들렸다.

  “그래, 어느 때부터인가 우린 편한 걸 원하고 안전한 걸 택하다 보니 인간이 던져주는 모이에 만족하며 살게 되었지. 자유를 포기하고 평화를 얻었던 건데 그게 사실은 종만도 못한 삶이었던 거야.” 어떤 젊은 수탉이 열변을 토했다. 

  “정말 그런 것 같아. 평화도 진정한 자유 속에서의 평화 라야 의미가 있지 자유가 없는 평화는 사기일 뿐이야.” 청닭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뼉은 치지 않았다.


  아무도 더 이상 말은 안 했지만, 모두 ‘꾸 꾸 꾸~’하며 눈을 크게 뜨고 채소를 부리로 쪼고 발로 헤집으며 신들린 듯 텃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한참을 신들린듯하다 보니 텃밭에 채소가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방닭이는 전과를 즉시 공참 총사령관에게 보고했다. 그 소식을 듣고 참새들이 떼로 날아와 손뼉 치며 격려를 보냈다.



  방닭이는 위엄을 갖추고 다음 목표인 이장 오만상 농장의 채소밭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닭들은 방닭이의 인솔 하에 농장의 채소밭으로 ‘콩 콩 콩’ 달려갔다. 닭들은 신이 났다. 방닭이와 수탉들은 목청 높여 ‘꼬끼오~“하고 울었다. 그 소리가 닭들에게는 전승 노래였지만 인간들에게는 ‘꼬소다~’로 들렸다. 워낙 채소를 좋아하는 데다가 싱싱한 채소를 실컷 먹으면서 마음껏 짓밟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닭장에 갇혀 스트레스만 받고 살다가 자유를 만끽하니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닭장 밖에서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싱싱한 먹이를 실컷 먹고, 잠만 닭장에 들어와 자면 되었다고 얘기를 들었다. 암탉과 수탉이 연애와 사랑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지금은 전설 같은 얘기가 되었지만, 알을 낳고 3주간 직접 품어서 병아리를 까고 품에서 직접 키웠다고 한다. 지금은 가끔 꿈으로만 꾸어볼 수 있는 ‘꿈같은 일’이 되었다. 

  달걀을 낳기 위해 키우는 닭은 하루에 한 알씩 오직 알만 낳는 게 주어진 임무이다. 알을 낳고 품어서 내 새끼를 깐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정말 궁금했다. 귀여운 내 새끼, 병아리를 직접 키우는 건 어떤 재미인지? 한 번만이라도 꼭 해보고 싶었다. ‘진정한 행복이란?’ 잘 먹는 게 아니라 그런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양계장 세상이란 것이 알 낳는 걸 조금만 게을리 해도 가차 없이 노계(老鷄)로 분리되어 끌려 나갔다. 

  옆 건물에 사는 육계는 더 불쌍한 삶을 살고 있었다. 많이 움직이면 살이 빠지고 육질이 질겨진다 하여 몸 하나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공간에 가둬 놓고 키우니 감옥도 그런 감옥이 없다. 태어난 지 한 달만 지나면 영계라 하여 삼계탕용으로 팔려나갔다. 그야말로 시한부 삶을 사는 거였다. 먹이를 공짜로 얻는 대가로 인간에게 길들여져서 결국은 남은 게 시한부 계생(鷄生)이었다. 



  부화기에서 부화한 병아리 중에 수놈은 더는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극히 소수의 선택받은 수놈만이 유정란(有精卵)을 위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수탉 방닭이가 그런 경우였다. 그렇다고 그 방닭이의 삶은 행복할까? 여기에서 잠깐, 방닭이 선배 보닭이 이야기를 잠시 하지 않을 수 없다. 


  보닭이와 계화는 서로 마음속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닭이는 계화만 사랑할 수 없는 처지였다. 모든 암탉을 공평하게 사랑해줘야 하는 임무가 그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보닭이는 규칙을 어기고 한 달간 계화만 사랑해 주었다. 그게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와 그런 일을 하기는 죽기보다도 싫었다. 그러자 다른 암탉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계화에게 돌아갔다. 암탉들은 집단으로 계화를 따돌리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보닭이 몰래 머리를 쪼아서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암탉들은 규칙을 지키라며 보닭이에게 집단으로 항의하고 대들기까지 하였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유정란으로 출하한 계란이 부화에 실패한 것이다. 주인 보석은 대규모 손해배상까지 해주어야 했다. 화가 난 보석이 보닭이를 퇴계(退鷄) 처리해 버리고 대타로 넣은 수탉이 방닭이었다. 보석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수탉 두 마리를 더 넣었다.


  방닭이가 닭장에 들어오자 암탉들은 모든 암탉을 공평하게 대해 달라고 요구했다. 보닭이 사건을 예로 들며 규칙을 어기면 어떤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지 명확히 알려 주었다. 방닭이는 규칙을 지킬 것을 약속하고 그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나 다른 수탉이 들어오면서 규칙은 현실에 맞지 않게 되었다. 자연적으로 다른 수탉들이 경쟁 관계에 있는데 싸워서 이기는 수탉이 암탉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방닭은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했지만, 암탉들이 상대를 고를 수 있도록 규칙을 고쳤다. 그 규칙은 잘 운영되는 듯했으나 곧 문제가 생겼다. 방닭이가 암탉들에게 워낙 인기가 있다 보니 암탉 대부분이 방닭이를 선택하는 거였다. 다른 수탉들의 불만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어떤 때는 방닭이 몰래 강제로 관계를 맺곤 했다. 방닭이 입장에서도 원하는 일이 아닌 데다 많은 수를 관계하려니 힘만 들었다. 

  방닭이는 고민 끝에 아이디어를 내었다. 어차피 감정을 갖고 사적으로 하는 일이 아닌 바에는 사감을 버리고 순전히 공적인 일로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암탉을 세 팀으로 나누어 수탉 세 마리가 나누어 담당하되 일 개월에 한 번씩 그룹을 바꾸기로 했다. 불만을 표하는 암탉도 일부 있었으나 결국은 모두 동의했다.

  그런데도 그는 요즘 고민에 빠졌다. 아니 생각이 많아졌다. 자기가 사랑하지도 않는 암탉들과 매일 수차례씩 의무적으로 그 일을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암탉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암탉만을 사랑해 주지도 못하면서 사랑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다른 암탉들은 나 몰라라 하면서 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닭의 삶이 이렇게 비참하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명확하게 알고 깨달은 것은 최근에 참새와 까치를 통해서였다. 사실 전에는 참새와 까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크기도 작은 데다가 변변한 집도 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밖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매나 부엉이를 피해서 사는 삶이 얼마나 고단할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마음대로 먹고, 마음에 맞는 좋은 짝을 만나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게 되었다.


  닭들은 나와 까치를 만날 때마다 너희가 한없이 부럽다 하며 다음 같이 하소연하곤 했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짝을 만나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백년해로(百年偕老)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단 하루만이라도 그렇게 살아 볼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거기에 또 하나의 욕심이랄까 원하는 게 있다면 내가 낳은 알을 직접 품어 병아리를 부화하고 키워보는 거다. 진정한 부모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하고 꼭 해보고 싶다.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을 먹고 이슬에 잠잔다는 뜻으로, 객지에서 많은 고생을 겪음을 이르는 말.

*백년가약(百年佳約 : 젊은 남녀가 부부가 되어 평생을 같이 지낼 것을 굳게 다짐하는 아름다운 언약.

*백년해로(百年偕老) 부부가 되어 한평생을 사이좋게 지내고 즐겁게 함께 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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