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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 보석 Nov 17. 2022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

 

                                                                                                                                                                                                              노란 보석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버지는 일제의 수탈과 탄압이 극에 달했던 '태평양 전쟁' 중에 징용으로 끌려가셔서 감전되어 20대 젊은 나이에 불구가 되었다.  어머니는 20대 초반에 '625 사변'겪으셨는데, 1951년 1.4 후퇴 때 집이 불타서 가족이 먹고 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두 분 모두 격동의 시기를 겪으며 이렇게 되돌릴 수 없는 상흔이 생겼고 그것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청진에 징용으로 끌려가서 전기에 감전되셨다. 모두들 죽을 거라 했는데 운 좋게, 아니 이천에 계시는 명의 한의사를 만나서 살아나셨다. 감전 부위가 등허리라 신경이 당겨서 약간 굽으셨다. 몸이 좋지 않으니 당연히 결혼도 못한 노총각으로 지내고 계셨다.


어머니 고향은 안성시 보개면 한사 마을이다. 북위 37도선에 위치한 관계로 1.4 후퇴 때 소개 작전으로 국군 집 불태는 참사를 당했다. 피난 갔다 오니 재만 남았는데, 땅에 숨겨둔 독 안의 쌀은 사라지고 나무 간에 숨겨둔 곡식은 숮이 되어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한다. 한겨울인데 식구 많아서 굶어 죽을 판이었다. 그동안 친척처럼 지내던 이웃들도 모두 모른 체하고, 민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평소에 그렇게 잘해 주고 친하게 지냈는데, 안면을 싹 바꾸는 걸 보고 너무도 섭섭했다고 하셨다. 당장 먹고살 수 없어 입이라도 하나 덜려고 시집오신 곳이 우리 집이었다.


아버님은 오 형제 중 둘째시다. 셋째 작은아버지가 결혼해서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둔 상황에서 결혼했으니 많이 늦으셨던 거였다. 그래서 어머니와 나이 차이는 자그마치 11살이나 난다. 짐작해보면, 먹고살기가 어렵지 않았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혼인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후에 얼마 전 사촌 큰형에게서 들은 말인데, 언젠가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걸 들었다며 전해 주었다. 시집와서 보니 사는 게 너무 기가 막혀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셨던 모양이다. 외갓집은 안성에서 가까운데 우리 집에서 20리 조금 더 되는 거리이다. 우리 동네에서 안성 가는 길에 ‘장 나들이 고개’ 라 부르는 고개가 있다. 지금은 골프장이 되어 없어졌는데, 걸어 만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다. 우리 어릴 적에는 대부분 그 길을 걸어서 삼십 리 거리의 안성장을 보았다. 가끔 강도가 나타나서 소 판돈을 빼앗아가는 일도 벌어지는 험하고 외진 곳이다. 옷 보퉁이 하나 들고 그 고개 위에 올라서서 고향 쪽을 바라보고 뒤 돌아보는데,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을 두고 가면 불쌍한 저 사람은 누가 돌보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셨다 한다. 게다가 마음이 착하고 바른 사람인데…. 결국은 눈물을 머금고 발걸음을 돌려 돌아오셨다고 한다. 내가 존재하는 것도,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그 결단이 있으셨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 후로 다시는 뒤 돌아보지 않고 치열하게 사셨던 것이다.


우리 집은 동네 한가운데 있었다. 그야말로 옛날 유행가 자락에 나오는 ‘초가삼간’에 살았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 건넌방 한 칸 해서 딱 세 칸이다. 마루도 없고 안방 앞에 신발 벗어 놓을 좁은 봉당이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여섯 식구가 복잡하게 살 비비며 살았다. 어린 나는 번듯한 집에 사는 사촌들과 친구들이 늘 부러웠다. 우리는 왜 이런 작은 집에 살지? 그런 집에 세간 내준 할머니에게 섭섭한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큰아버지 집은 산 밑에 있었는데 오래된 집이지만, 크고 사랑채까지 있는 데다 창고처럼 쓰는 광과 헛간이 따로 있었다. 게다가 우물도 별도로 있었다. 셋째 집은 큰집 옆에 붙어 있었는데 크지는 않았지만 반듯했고 안방도 크고 마루도 있었다. 넷째 집은 우리 집 뒤에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새집이었다.


우리 집 앞에 공동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여섯 집이 함께 먹다 보니 물이 항상 부족했다. 물 풀 때 두레박이 바닥 바위에 닿는 소리가 매일 나다시피 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물을 많이 퍼가면 뒤에 오는 사람은 항상 부족했다. 그래서 눈치 싸움이 심했고 가끔 다툼도 있었다. 어머니는 항상 일등 아니면 이등이다. 첫닭이 울면 물부터 길러 나가셨으니까. 잠결에 물 푸는 소리가 들리면 지체 없이 일어나 나가셨다.


우리도 소 외양간 따로 있었고 거기에 닭장이 붙어있었다. 어린 수 송아지를 사다 일 년쯤 키워서 팔아 살림을 늘려 가셨다.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작지만 산도 사셨다.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버지 5형 제 중 우리만 빈곤하게 사는 거였다. 세간 나올 때 왜 할머니는 몸도 성치 않은 둘째 아들에게 그리 각박하게 하셨을까? 사실 징용도 다섯 형제들을 대신해서 아버지가 대표로 나가신 것이었다. 사고를 당한 건 아버지 잘 못이지만, 그런 상황을 왜 고려해 주시지 않았는지 섭섭다.


큰 집은 논도 많고 밭도 큰 게 여기저기 많았다. 동네 집터 모두 큰 집 소유였다. 셋째 작은 아버지는 소 장사를 하셔서 닷새에 한 번 안성 장날이면 들어오셨는데 제일 여유롭게 사셨다. 수원에도 집이 있어 사촌 누나와 형들은 모두 수원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넷째 작은 아버지는 양성면 산업계장으로 계셨으니 남 부럽지 않게 살았다. 다섯째 작은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면 소재지가 있는 양성 옆 동네 교동에 사셨다. 나중에 다섯째 어머니께 들은 얘기이지만, 결혼해서 땅 한 평 받지 못해 고생을 많이 했다며 섭섭해하셨다. 선생이란 직업이 있으니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을까? 모두들 그 집은 여유롭게 잘 사는 걸로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고등학교 때 인천에서 함께 살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식이 다섯이나 되니 선생 월급으로는 생활비도 빠듯한 상태였다. 아무튼 우리가 제일 못살았으니 부모님은 항상 쪼들리는 살림에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몸도 성치 않으신 데 잠시도 쉬시는 걸 본 일이 없다.


그런 데다가 가슴 아픈 일을 겪으셨다. 형이 어렸을 때 사촌 형이 나무 깎던 칼이 튀어서 한쪽 눈을 찔리는 사고를 당했다. 급히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갔지만, 고칠 수 없었다. 그게 형한테는 핸디캡이 되고 부모님은 평생 한으로 남았다. 말로 표현은 안 하셨지만, 아버님도 사고로 평생을 고생하셨으니 그고통을 누구보다도 더 뼈저리게 느끼셨을 거라 생각된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새 집을 지었다. 선산에서 아름드리 낙엽송을 베어다가  손으로 켜서 11칸 집을 지었다. 송진 냄새 풍기는 새 집에 누워서 느끼는 행복감을 어떻게 표현이 가능할까! 부엌만큼 넓은 다락방까지 있었으니 어린 나에게는 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마당 한편에 물 잘 나오는 우물도 팠다. 가뭄이 심할 때 팠는데 물이 안 나와서 며칠 동안 애를 먹었다. 바위를 한 참이나 깨고 내려가니 어린아이 오줌 누는 것처럼 물이 솟아 올라왔다. 다 좋았는데, 집 방위가 풍수상 마음에 안 든다고 아버님은 아쉬워하셨다. 결국은 집을 해체해서 돌려 앉히셨다.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으시니 약탕기에 약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정말 지극 정성으로 돌보셨다. 염소를 길러 염소 탕도 하시고 닭을 길러 삼계탕도 끓이시고, 직접 개를 키우진 않으셨지만, 보신탕도 꽤나 끓이셨다. 몸에 좋다 하는 건 뱀탕, 녹용 말고는 다 해 드린 것 같았다. 녹용은 돈이 없어 쳐다보지도 못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아쉽다. 이천에 한의사가 가을걷이가 끝나면 한약을 지어 갖고 서 며칠 동안 침을 놓아주고 가셨다. 길게 늘인 흰 수염과 풍채가 좋으셔서 도인 같은 범상치 않은 모습이셨다. 아버지 생명의 은인이시니 존경심을 갖고 온 식구가 열과 성을 다해 모셨다. 큰집 작은 누나를 며느리 삼고 싶어 하셨는데 성사되지 않아 인연이 끊어졌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쉬운 일이다.


아버지는 비록 몸은 성치 않으셔도 농사일이나 바깥일은 남 못지않게 하셨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던 폐결핵에 걸려 졸지에 돌아가셨다. 면역력이 약해서 그러셨을까? 약도 있던 시절인데 예순의 아쉬운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머니 마흔아홉, 내 나이 스물이었다. 지금처럼 건강 검진이 있어 조금만 일찍 발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다.


아버님을 뒷산에 모시고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었다. 어머니께서 “장나들이 네 마지기 논은 보석이 앞으로 해라. 아버지도 항상 이 논은 보석이 준다고 하셨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감사합니다만, 저는 되었습니다. 형님이 어머니 모시고 동생들 돌보며 함께 사는데 그냥 형님 앞으로 하세요. 형님이 고향 지키며 사실 거잖아요. 저는 오늘부터 형님을 아버님처럼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만에 하나 내가 어려운 일이 있다면 형님이 못 본 체하겠습니까? 또, 어린 동생들을 아버지 대신 잘 돌보고 시집도 보낼 텐데….” 형의 눈이 좋지 않은 점도 내가 그렇게 말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스무 살 젊은 나이의 패기일까? 나는 어떻게 하든 잘 살 자신이 있었고 그리 하고 싶었다. 진정 형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아 주길 바랐다. 어머니 아버지처럼 자수성가해서 잘살아 보고 싶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우리 집이 잘 살아서 재산을 많이 물려받았으면 어땠을까? 생활이 여유로웠다면 과연 내가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을까?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해 고생한 아내에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 그래도 애들 셋 모두 대학원까지 졸업시키고 결혼까지 했으니 부모 역할은 다 한 것 아닌가 싶다.


동창회에서 친구들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데, 땅 좀 있고 잘 살았던 집은 형제간에 사이가 틀어져서 왕래도 안 하거나 소송 중인 경우가  많다. 떵떵거리고 잘 살았던 집이 하루아침에 쫄딱 망한 경우가 제법 된다. 허황된 생각과 방탕한 행동으로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한 경우를 여럿 보았다.


나는 애들이 어렸을 때부터 “너희가 공부를 한다 하면 끝까지 가르칠 것이나 재산 물려받을 생각은 마라!”라고 말해 왔다. 둘째 딸이 대학원 재학 중에 결혼했지만, 마지막 등록금까지 내주었다.


아비로서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에 대한 답을 다 주진 못하지만,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주고 싶었다.

세상은 결코 녹록지 않으니 진지하게 살 일이다. 그래도 어머님 아버님 보다, 또 이 아비나 엄마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47년 만에 하늘에서 만나신 아버님과 어머님이 그곳에서는 고단하지 않고 즐거우면서도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금슬은 여기서도 좋으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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