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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풀꽃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서 예쁜 구석을 찾아내야지.

by 은향


긴 시간 동안 어떤 글도 쓰지 않았다. 아니, 쓰지 못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작가도 아니고, 더더욱 유명한 작가도 아니지만 그냥 혼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년 12월 3일, 얼토당토아니한 계엄령과 그 이후에 벌어진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듯이 답답했고, 시국과 관련 없는 한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미 써 둔 글을 발행하지도 못했다. 드디어 윤이 파면되었지만, 아직도 꺼지지 않은 그 세력들의 가당찮은 짓들과 후안무치의 언행에 또다시 경악했다. 매일 신경을 곧추 세운 채 뉴스를 확인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나태주 시인은 "비가 그치지 않는 장마는 없다."라고 말했다. 한숨이 나오는 현실이지만, 나는 나대로의 삶을 잘 살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마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기도하며, 계속해서 나의 글을 다시 써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상에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큰 변화를 맞이했고, 내 삶 역시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2년간 장거리 출근을 했던 학교를 옮겼다. 집 근처로 발령이 나서 정말 다행이었지만, 장점은 딱 그거 하나였다.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중학교에 발령이 났고 8년 만에 담임을 맡게 되었으며, 하필이면 중2 담임이었다. 수업 시수는 주당 20시간이나 되었다. 월요일 빼고 4교시 수업이 있는 데다가 4교시와 5교시가 연달아 붙어 있었다. 하루에 5시간 수업인 날도 이틀이나 되었다.

우려했던 대로 중학생들은 이상했다. 정말이지 너무도 이상했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 버릇없고 개념 없는 태도에 수차례 뒷목을 잡았다. 학년 교무실에서 담임들은 공강이나 쉬는 시간마다 어린이집 보모와 같은 역할을 해야 했고, 철없다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영악한 아이들을 끊임없이 훈계하고 타이르고 한편으로는 달래줘야 했다.


친구들 간의 사소한 언쟁과 장난, 몸싸움부터 SNS에 올린 친구에 대한 험담과 조롱은 기본이고, 남의 가방을 뒤지고 거짓말을 하는 아이, 친구의 얼굴에 침을 뱉은 아이, 학교 시설을 훼손하고 다니는 아이, 수업시간에 휘파람을 불고 노래를 하는 아이, 교사에게 대들며 버릇없고 예의 없는 아이, 쓸데없는 고자질 하는 아이 등 별의별 아이들이 많았다. 청소 지도를 하는데 쫓아다니면서 하나하나 알려주고 확인해야 해서 족히 25분은 걸렸다. 어처구니없는 일도 많아 어떤 때에는 현실인지 시트콤 속 상황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대화가 가능한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도대체 정상적인 사고와 언행을 하지 않는 중학생을 대하니 정말이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피곤한 평일 퇴근 후에도 술이 간절했지만, 겨우 참아내곤 했다. 3월 한 달이 일 년처럼 길었다. 나이가 한 살 더 들어도 좋으니 빨리 12월이 오기를 기다렸다. 매일매일 아이들이 사고 치지 않고 학교 생활 잘하며, 예의 없는 아이가 없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4월이 되고 나니 아이들은 선생님에 대한 간 보기가 끝났는지, 뒷목 잡을 일이 다행히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거나 절대 안심할 수는 없다. 사고 치는 아이들 뒤처리 하고 한숨 돌리며 그래도 아이들이 귀엽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말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아이가 느닷없이 일을 저지르곤 한다.


중학교는 전쟁터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이들을 상대하며 매번 아슬아슬하게 지뢰밭을 걷는 심정이다. 쉬는 시간마다 12명의 선생님들이 생각 없는 아이들을 지도하는 내용을 듣고 있자니, 이러다가 우리 몸에서 조간만 사리가 터져 나와 교무실을 뚫어버릴 것만 같다. 어휴, 정말이지 담임을 더 이상은 못할 것 같다. 올해로 담임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 나태주 시인의 문학 강연을 들었다. 시인은 '풀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자세히 봐야 예쁘다는 건, 안 예쁘다는 거다. 짜증 난다는 거다. 교실에 이런 아이들이 참 많았다. 교장이 되고 나서 한 발짝 뒤에서 아이들을 보니 그제야 아이들이 좀 예뻤다. 교장이 돼서도 가끔 아이들이랑 수업을 했는데, 풀꽃을 그리라고 하니 엉망진창으로 그렸다. 아이들에게 풀꽃을 자세히 보라고, 자세히 보면 예쁘다. 너희들도 그렇다고 했던 말을 그대로 시로 쓴 것이다.



국어 수업 시간에 류시화의 "나의 모국어는 침묵"이라는 수필을 가르치고, 인디언식 이름 짓기 활동을 했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과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담아 자신의 인디언식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친구를 관찰하고, 친구의 장점과 특징을 담아 친구의 인디언식 이름을 짓고 발표했다. 서로 비방하고 조롱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태주 시인의 '풀꽃 1'과 '풀꽃 2'를 먼저 읽었다.



풀꽃 1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2

- 나태주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각반에서 이 시를 설명하고, 각 반에서 장난꾸러기들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으며 내가 말했다.

"자세히 봐야 예쁘고, 정말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친구들이 여기에도 있네요. 그렇죠?"

무슨 의미인지 알듯 말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봐 주니 좋은지 어떤 반 장난꾸러기는 자신의 얼굴에 꽃받침까지 하며 나를 본다.


"**이는 이 반에서 풀꽃 1이다. ##이는 풀꽃 2고."

뒤쪽에 앉은 또 다른 까불이가 묻는다.

"선생님, 저는요?"

"그래 너는 풀꽃 3다."

풀꽃 1, 2, 3들은 마냥 좋다고 헤헤댄다.


친구의 인디언식 이름 맞히기를 했더니 아이들이 서로 맞히겠다고 난리를 친다. 교과서 진도 나갈 때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아이들도 눈빛이 반짝인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나를 이기는 친구에게 발언권을 먼저 준다.


"운동을 좋아하는 착한 트랄라레오 트랄라라"

"춤 잘 추는 퉁퉁퉁 사우르"

인디언식 이름 지으라고 했더니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이탈리아 밈 속의 의미 없는 말을 넣어 발표한다. 뜻깊은 내용을 담아 인디언 이름을 지으라고 하니, 요즘 가장 핫한 말이라며 선생님은 모르냐고 반문한다. 아이들은 수업이 끝났는데도 교탁으로 몰려와 나에게 트랄라라 관련된 밈을 동영상으로 찾아 보여주며 재미있다고 킥킥거린다. 해맑은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각 반마다 포진되어 있는 이 수많은 풀꽃들을 나 역시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서 사랑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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