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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향 Oct 18. 2021

당근의 노예가 된 시간

당근의 노예로 살다

  핸드폰에 필요 이상의 앱을 까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깔아두고 괜히 용량만 차지하는 앱도 참 많다. 최근에 아주 유용하게 이용하는 앱은 '당근**'이다. 몇 년 전에 지인이 소개해주어 깔아두었는데 막상 사용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 최근에 여러 가지 물건을 사야할 일이 있어 다시 방문을 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사용을 안해봐서 잘 몰랐는데, 몇 년 만에 다시 이용하다보니 소비자에게 유용하게 앱을 참 잘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느꼈다. 일단 동네 인증을 하다보니 판매자와 구매자가 근거리에서 만나서 주고 받기도 편하고, 거래 후기를 통해 상대방의 매너를 알 수도 있다. 키워드 알림을 통해 내가 원하는 물건이 올라온 상황을 바로바로 알림 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채팅 숫자나 관심목록, 조회수 표시를 통해 내가 사려는 물건을 눈독 들이고 있는 경쟁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약속을 앞두고 전화번호 교환없이 사용할 수 있는 당근 전화 기능처럼 여러 가지 편리한 기능이 많아 사용하면서 만족도가 높아졌다. 쓰지 않는 물건을 거래하는 벼룩시장의 아이디어를 플랫폼으로 옮긴 것 자체가 좋은 의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것이든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법. 키워드 알림은 내가 원하는 물건이 올라오면 바로바로 알려주어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기능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키워드 알림을 누구나 다 설정해 놓고 원하는 물건을 확인하다보니, 재빠른 확인과 선점이 물건 득템에 가장 중요한 능력이 되었다. 알림 소리를 듣고도 잠시 다른 일을 하느라 10~20초 뒤에 확인하고 판매자에게 인사를 하면, 벌써 다른 구매자와 예약중인 경우가 다반사였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당근' 앙증맞은 알림음이 울리면 양손의 물기를 재빨리 거두고, 휴대폰 패턴을 풀어야만 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물건을 구할 때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당근의 노예'가 되었다. 당근님께서 '당근'하고 무심코 부르면, 재빠르게 뛰어가서 '네, 저 왔습니다.' 하고 당근의 지시를 즉시 확인한다. 당근님께 신속하게 갔으나 내가 원하지 않는 물건으로 나를 놀릴 때도 많다. 예를 들면, '자전거 라이트'를 키워드 알림을 설정해 놓았는데, '라이트 에센스 브라이트', '스탠다드 라이트 마스크 소형', '라이트 웨이트 베이직 블레이저 재킷', '동*참치 라이트 스탠다르'를 보여주며 골탕을 먹이기도 한다. 화장실에 다녀 온 사이에 당근님이 호출을 뒤늦게 확인하면, 바로 내가 원하던 물건이 좋은 가격에 떡하니 올라와 있지만, 이미 남에게로 가고 있는 중이다. 결국,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때까지 나는 당근님에게 순발력 좋은 노예가 되어야 한다. '아, 먹는 것도 느리고 민첩성하고는 거리가 참 먼데, 이를 어이할꼬...'


  첫 거래 물건은 핸디형 스팀 다리미였다. 친구 집에서 소형 스팀 다리미를 써 보니 가볍고 주름도 잘 펴지고, 사용하기에도 간편했다. 집에 다리미가 있지만 스팀 다리미를 갖춰 놓는게 좋을 것 같아 바로 알림을 설정했다. 며칠 동안 알림 확인을 하다 적당한 물건을 찾았고, 몇 번의 채팅 끝에 거래 약속도 잡았다. 판매자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게 일반적이라 집에서 다소 떨어진 거리였음에도 차를 갖고 시간에 맞춰 갔다. 나중에 거래후기도 중요하니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물건을 받고 준비한 봉투에 돈을 건네는데 판매자가 시원한 탄산수 한 병을 건넨다. 


  "더운데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시원하게 한 모금 하세요."

  "네, 잘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별거 아닌 500ml짜리 탄산수 한 병에 기분이 좋아졌다. 작은 배려에 따뜻함이 느껴져 구매 후기를 아주 좋게 잘 남겼다. 


  며칠 후 피아노 악보책 한 권을 무료로 나눔을 받게 되었다. 나도 작은 배려를 실천하고 싶은 마음에 냉장고에서 시원한 비타민 음료를 챙겨 나갔다. 

  "어머, 오래된 악보 드리는 건데요.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별거 아니에요. 악보 잘 볼게요.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원래 사용하고 있는 의자가 있는데, 앉는 부분의 쿠션감이 안 좋고 폭신하지 않아서 의자를 바꿔야 했다. 원하는 의자를 갖게 되기까지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겨우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의자의 조건은 앉는 부분의 쿠션감이 조금 있는 것, 높낮이 조절과 뒤로 젖혀지는 것이었다. 


  며칠 째 당근님의 호출을 기다린 끝에 무료로 의자를 나눔한다는 당근님의 통보를 받았다. 판매자와 몇 번의 채팅을 주고 받으며 약속 시간을 정했다. 뒤늦게 높낮이 조절과 뒤로 젖힘이 되는지 물었다. 높낮이 조절은 되지만 뒤로 젖힘이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약속을 했으니 일단 가서 앉아보고 허리가 불편할 정도가 아니면 가져올 생각이었는데, 상대방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나눔을 하겠다고 해 버렸다.


  그 후 또 다른 의자가 무료 나눔으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지를 먼저 물었다. 사용감은 있지만, 조건에 다 부합하기에 약속을 잡았다. 상대방은 20대 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으로 보였다. 아주 친절하게 차 트렁크에 의자를 올려주기까지했다. 다른 곳에 갔다가 시간 맞춰서 급하게 가느라 음료수도 하나 못 챙겨간 채 그냥 받아온 게 미안하기까지했다. 고맙다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기쁜 마음에 집에 의자를 들여놓고 물티슈로 곳곳마다 깨끗하게 닦았다. 의자에 방향제를 뿌렸는지 향기가 곳곳에 났다. '깔끔하게 방향제까지 뿌려주다니 젊은 남자가 참 센스있네.' 고마운 마음이 더 커졌다. 바퀴까지 샅샅이 닦고 방에 의자를 들여놓고 앉아보니 등받이 뒷 부분이 조금 들떠 있었다. 그래도 무료인데 이 정도 흠이야 뭐 괜찮다 싶었다. 앉는 부분 쿠션감이 아주 좋고 뒤로 젖힘도 잘 되었다. 조금 있으니 또 다른 단점이 눈에 들어왔다. 팔걸이가 높아서 책상 밑으로 의자가 쏙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에이, 무료인데 뭐...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음 날 서재방에 들어가니 방 안에 이상하게 발꼬랑내가 풍겨왔다. '어? 뭐지? 이 냄새가 어디서 나는 거야?' 냄새는 점점 더 심해졌다. 내가 워낙 후각이 예민해서 그런건가 싶기도 했지만, 이 발꼬랑내 같은 냄새는 더 이상 참기에 힘들었다. 냄새의 근원을 찾다가 의자에 깔고 앉았던 방석을 들춰보았더니 방석 아랫부분이 흥건해져 있었고, 의자가 축축했다. '대체 왜 의자에 물기가 있는 거지?' 의아했다. 


  몇 번을 고민을 하다 판매자에게 채팅으로 연락을 했다.

 - 안녕하세요. 여쭤볼 게 있는데요. 의자에서 냄새가 좀 나고, 앉는 부분에서 왜 물기가 축축하게 올라올까요.

 - 아, 죄송합니다. 의자가 약간 더러워서 세탁을 했는데 잘못 되었나봐요.

 - 의자를 세탁하신 거였어요? (축축해서 누래진 방석 사진을 보내고) 물기가 올라와서 방석이 이렇게 되었어요. 발꼬랑내 같은 냄새도 나고...

  - 제가 말린다고 엄청 말렸는데 잘못 말려진 것 같아요. 


  의자를 세탁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물기가 제대로 안 말라서 그렇게 발꼬랑내가 심하게 났던 거였다. 미안하다며 대형 폐기물 신청해 놨으니 의자를 다시 가지고 오라고 했다. 다시 약속 시간을 맞추고 차에 의자를 실어 갖다 주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무료 나눔이라고 막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밤 10시쯤이 되어 의자 무료 나눔이 또 올라왔다. 무료 나눔 받는 것에 신중하기로 했으나 머리보다 내 손이 더 신속하게 채팅을 했다. 다행히 판매자와 바로 연결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당장 가지러 오란다. 비도 오고, 밤 10시가 넘은 시간인데, 어쩌지... 잠시 생각하고 할 수 없이 알겠다고 하고, 옆 동네로 차를 타고 향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판매자의 오피스텔 근처에서 10분 넘게 헤매고 겨우 건물을 찾을 수 있었다. 비가 심하게 내리는데 옆 지상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라고 하기에, 지하 주차장에 들어갈 수 없냐고 했다. 그제서야 자신의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을 알려줬다. 진작에 지하로 들어오라고 했으면 좋았을걸... 


  비대면 문고리 거래로 오피스텔 현관 앞에 둔 의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막상 집에 와서 보니 내가 쓰고 있는 의자랑 형태가 아주 비슷했다. 앉는 쿠션 부분이 도톰하길 바랐는데,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허리부분에 기댈 수 있는 곳이 하나 더 있고, 앉는 부분이 가죽으로 되어 있어서 조금 더 편하기는 했다. 결국 이렇게 긴 과정 끝에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의자를 겨우 갖게 되었다. 


  이제 기존 의자를 나도 나눔하는 일이 남았다. 작은 나눔이라도 당근에 올려놓고 오는 채팅에 일일이 답하고, 시간 맞춰서 전달하는 것 자체가 참 번거로운 일이었다. 때로는 비대면 문고리 거래를 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상황이 안 될 때도 있다. 별거 아닌 물건이라도, 굳이 나눔을 실천하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막상 나눠보려니 알게 되었다. 선한 나눔의 의도가 없다면 차라리 그냥 재활용으로 버리는 게 더 간단하고 손쉬운 일이다. 미니멀 라이프까지는 실천하지 못하더라도 집안 곳곳을 정리정돈 하고, 쓸모 있는 것들을 나누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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