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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향 Oct 14. 2021

피아노에 대한 로망

삼심 년이 지나 다시 피아노를 치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살짝 배운 적이 있다. 피아노학원에 지속적으로 쭈욱 다닌 것이 아니라 달력에 빨간 날이 많은 달에는 엄마가 학원비를 아끼느라 보내지 않아 그마저 띄엄띄엄 다녔기에 피아노를 잘 치지는 못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처음 피아노를 배워서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체르니 30번을 쳤었던 것 같다. 


  따로 반주법을 배운 적도 없고, 일 주일에 두 번인가 세 번인가 가서 배우는 체르니는 어렵기만 했다. 익숙하고 멜로디가 듣기 좋은 곡들을 연주하고 싶었으나 학원에서는 진도만 나갈 뿐이었다. 집에 피아노가 있다면 내가 치고 싶은 곡을 아무때고 자유롭게 칠 수 있을 것 같아서 엄마에게 피아노를 사 달라고 했다.


  "우리 곧 이사갈 수도 있어. 피아노는 부피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서 나중에 이사갈 때 짐이 되고, 그것 때문에 이사비용이 얼마나 더 추가될 지 몰라."

  엄마는 이사를 핑계로 피아노를 사 주지 않았다.(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우리 집은 이사를 가지 않았다.) 당시에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2층 양옥집이자 거실에 피아노가 있는 황 선생님 사모님한테 말해놓을테니 피아노 치고 싶으면 거기에 가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저, 엄마가 말씀해 놓으셨다고... 피아노 치러 왔어요..."

  "그래, 왔니. 마음껏 치고 가."

  "감사합니다."


  쭈뼛쭈볏 수줍게 현관에 들어서는 나에게 황 선생님 사모님은 호탕한 목소리로 반겨주셨다. 황 선생님댁엔 아들 2명과 딸 1명이 있었다. 고등학생인 언니가 어릴 적 쳤던 그 피아노는 오랫동안 거실 한켠에서 집안의 부를 나타내주는 고급 가구로만 품격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에 피아노 학원을 다닌지 몇 달 안 되었을 때라 내 피아노 실력은 보잘 것 없었다. 남의 집에서 자꾸 틀려가면서 피아노를 치는 게 영 부끄러웠다. 자꾸 건반을 잘못 짚고 박자를 놓치는데 황 선생님댁 가족이나 나보다 1살 위인 황 선생님댁 아들이 들으면 비웃을 것만 같았다. 여러 번 쳐 봐서 가장 자신있게 잘 칠 수 있는 곡만 몇 곡 연달아 치고 슬그머니 인사를 하고 나오곤 했다. 



  초등학교 옆에 살았기에 주말에는 가끔씩 초등학교에 가서 일직을 하시는 선생님께 허락을 구하고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학교 음악실은 1층이었는데, 그 곳에서 피아노를 치면 1층 교무실을 비롯한 복도 전체에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다보니 또 부족한 내 연주 실력이 더욱 큰 소리로 전달되어 새로운 곡을 연습하기에는 부끄러웠다. 자꾸 틀리더라도 여러 번 연주를 해야 마스터를 하는 법인데, 틀리는 게 창피해서 외울 수 있는 쉬운 곡만 계속 치다 말았다. 


  이런 내 실력도 제대로 모른 채 엄마는 우리가 다니는 시골 교회에 사역하는 전도사님의 두 딸이 모든 예배 시간에 피아노 반주를 차지하고, 나에게는 반주를 시키지 않는다며 섭섭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내 실력은 예배 반주를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 스스는 잘 알았다. 


  반주법을 배운 적이 없어 코드를 알지도 못하고, 이제 막 체르니 30번을 시작하게 된 정도일 뿐인데, 엄마는 아무 근거도 없이 내가 당연히 찬양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 찬양 연주 코드법을 안 배워서 못 쳐."라고 아무리 말해도 "피아노 학원을 다닌 게 2년이나 되는데 그걸 왜 못 쳐. 하면 하지."라며 내 피아노 실력을 아무 근거없이 자신했다. '그게 무슨 2년이야. 연휴 낀 달에 안 보낸 거 빼고 진짜 학원 다닌 건 1년도 채 안 될걸... 실제 피아노를 친 시간만으로 따지면 몇 달도 안 될텐데...' 그나마 다행인 건 전도사님이나 사모님은 자신의 두 딸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반주를 시키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어 체르니 30번의 중간까지 쳤을 때 즈음에 엄마는 이제는 공부하라며 피아노 학원도 더이상 보내주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딱히 피아노를 칠 기회도 마땅히 없었고, 자연스럽게 피아노와는 멀어졌다. 가끔 학교 음악실에서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피아노를 열고 좋은 곡을 자유롭게 치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나도 집에 피아노가 있었다면, 쟤들만큼은 칠 수 있었을텐데...  


  성인이 되어서도 피아노는 그냥 로망으로만 남았다. 피아노를 멋지게 연주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부러운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하고 나서 가끔씩 퇴근 후에 피아노를 다시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 급한 일들에 치여 정신없는 삶 속에서 꾸준하게 피아노 학원을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마음 속에 다시 접어두었다.  



  몇 달 전 같이 근무했던 친한 J샘 집에 들른 적이 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거실 한 켠에 자리잡은 하얀 색의 디지털 피아노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우와, 요즘 피아노 치세요?"

  "응. 그냥 혼자 재미삼아 쳐요."

  "멋지네요. 저도 피아노 치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학원을 다시 다니기도 그렇고 엄두가 안 나던데요."

  "학원 안 다녀도 돼요. 그냥 디지털 피아노 중고로 사서 유튜브 보면서 시작해 봐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 치고 안 쳐서 손가락도 다 굳었을 걸요. 요즘 눈도 너무 빠져서 악보를 볼 수나 있을까요?"

  "에이, 나도 하는데~ 어렸을 때 쳐 봤으면 더더욱 잘 할 수 있어요."

  "유튜브에 찬송가랑 CCM 연주하는 거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콘텐츠 좋은 거 있어요. 내가 링크 알려줄테니 한 번 시작해 봐요. 찬양곡은 연주하면서 은혜롭기도 하고, 반복이 많아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날 J샘은 나에게 독학으로 배운 실력이라 하기엔 너무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J샘의 찬양 연주에 맞춰 같이 찬양을 몇 곡 불렀다. 그 순간들이 답답하고 힘겨운 내 마음에 따뜻하고 평안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예전에 힘들 때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음악이 주는 치유의 힘을 느낀 적이 있는데, 찬양곡들은 위로만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함을 더해 주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J샘의 연주에 함께 찬양 불렀던 순간이 영화 속 장면처럼 뇌리에 남았다. 30년이 지나 이제와서 다시 피아노에 대한 로망이 점점 부풀었다. '다 굳어 버린 손은 꾸준한 연습으로 풀면 되고, 악보도 제대로 안 보일만큼 나빠진 시력은 안경을 끼면 되지 뭐.' 더 늦기 전에 피아노를 쳐야 할 것 같았다. 찬양 연주를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위로를 주면서 하나님께도 기쁨을 드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거나 보이기 위한 연주가 아닌, 나를 위로하는 연주이자 하나님께 올리는 연주를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나에게 피아노가 생겼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피아노를 30년 만에 갖게 되었다. 당근 앱에서 피아노를 키워드알림 설정하고 알림이 올 때마다 잽싸게 확인하고 몇 차례 연락을 주고 받았다. 조금 늦게 연락하는 바람에 맘에 드는 피아노를 놓치기도 하고, 판매자와 시간이 안 맞기도 하는 등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드.디.어. 내 피아노를 갖게 되었다. 로즈우드 색깔의 삼익 디지털 피아노이다. 중고인지라 약간 오래되어 건반색이 누렇게 바래긴 했으나 건반이나 페달 모두 이상없이 소리가 잘 나왔다. 중고면 뭐 어때, 소리만 잘 나면 되지.


  피아노가 생긴 뒤로 일 주일에 서너 번 이상 피아노 연주를 한다. 한 번 치다보면 1시간 이상 몰두해서 계속 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CCM곡을 연주하면서 큰 은혜가 되고 위로를 받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음 속으로 생각만 하지 말고, 진작에 피아노를 살 걸.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간 탓, 나이 탓 등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기보다는 바로 시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TV자막도 잘 안 보일 정도로 나빠진 시력이 악보는 그런대로 잘 보고 있다. 몇 곡 쳐 보니 신기하게 손가락도 어느 정도 감을 찾았다. 물론 아직은 다소 서툴고 부족한 실력이지만, 여러 번 계속 치다보니 점점 안 틀리고 자연스럽게 연주하고 있다. 요즘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피아노로 CCM 찬양 연주를 하는 시간이다. 내 찬양 연주를 하나님도 기쁘게 받아주시겠지. 

내 피아노와 요즘 연습하는 CCM 악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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