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김창열 작가의 전시회에 다녀와서
물방울 작가로 유명한 김창열 작가의 회고전에 다녀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025.8.22~12.21까지 김창열 작가의 예술세계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작품을 깊이 있게 감상하기 위해 도슨트 해설을 듣기로 하고, DK와 도슨트 시작 30분 전에 만나 6 전시실을 먼저 관람했다. 전시실의 중앙 바닥에 전시해 놓은 커다란 물방울 작품이 먼저 시선을 끌었다.
도슨트는 전시실 초입에 있는 캔버스의 뒷면에 적힌 "FRESH AND SPIRIT"라는 문구를 먼저 보라고 했다. 도슨트는 이 글귀가 김창열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하며, 작품 설명을 시작했다. 김창열 작가(1929~2021)는 1929년 평안남도 맹산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양철학에 해박한 문인이셨던 할아버지로부터 어렸을 때 한자와 서예를 배운다. 할아버지에게 그 시절에 배운 도교, 선불교, 유교 경전에 나오는 위인들의 삶과 사상은 그의 후기작 <회귀> 시리즈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김창열은 16세에 홀로 월남하여 광복과 분단, 전쟁 등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는다. 광복 이후, 이쾌대 작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미술 교육을 받고, 서울대 미대에 진학하지만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이후 제주도에서 1년 6개월간 경찰 생활을 하며 그림과 문학 활동을 병행한다.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동료 경찰의 추천으로 <경찰신조> 표지화를 그리기도 했다. 김창열은 어려서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전시회장 입구에는 그가 쓴 시 <동백꽃> 전문도 있었다.
한국전쟁은 김창열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 중에 그가 아끼던 동생을 잃었고, 중학교 동창 60명이 죽었다. 그 역시 전쟁터에서 수없이 많은 총알을 비껴가는 극단적 생존을 체험했다. 당시 그의 작품에는 총알 자국과 탱크 자국 등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전쟁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절규를 캔버스에 표현했다. 그의 초기작들은 '제사'라는 제목으로 전쟁의 상처를 형상화하며, 한국 앵포르멜 회화를 선도했다.
이후 김창열 작가는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와 1965년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여하며, 국제무대에 진출하게 된다. 1965년, 그는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뉴욕으로 건너간다. 하지만, 그의 앵포르멜 회화는 주목을 받지 못했고, 미국의 팝아트를 접한 김창열 작가는 자신의 추상미술에 대해 자신감을 잃기도 했다. 뉴욕에서 그는 생계를 위해 수많은 일을 전전했고, 넥타이 공장을 다니며 익힌 스프레이와 스텐실 기법으로 새로운 형식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앵포르멜의 두껍고 거친 질감이 사라지고 매끈하고 정제된 화면 위에 기하학적인 형태가 등장했다. 착시를 일으키는 원근감과 함께, 응축된 에너지가 외부로 팽창하는 듯한 이미지를 표현하였다.
김창열은 절망감을 주었던 뉴욕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1969년 파리로 거처를 옮긴다. 이 시기의 <현상> 연작은 이전의 기하학적 형태가 녹아내리듯 흐르는 유기적 형상으로 표현하고, 응집된 덩어리는 마치 인체의 장기처럼 점액질로 표현하였다.
끈적이던 점액질의 형상은 1971년, 마침내 투명한 물방울로 변모한다. 작가는 재사용하려던 캔버스에 뿌려둔 물이 맺힌 것을 본 순간, 그 안에서 완성된 형태의 충만함을 발견한다. 예수님이 탄생한 12월 24일에 태어난 김창열 작가는, 파리 외곽 팔레조의 마구간을 개조한 열악한 작업 공간에서 발견한 물방울의 조형성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했다. 공교롭게도 마구간에서 그가 만난 물방울의 영롱하고 충밀한 모습에서 운명을 넘어서는 벅찬 감격과 종교적인 체험을 느꼈다고 한다. 전쟁의 상흔에 대한 치유와 정화, 고통과 불안의 소멸, 무위 등... 그의 물방울은 단순한 물질적 재현을 넘어 동아시아 철학 전통과 깊은 접점을 이루는 정신적 사유의 매개체로 확장되었고, 김창열만의 독자적인 예술 언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방울과 거기에 비친 빛과 그림자, 그의 물방울 그림은 대단히 사실적이다. 물방울의 위치를 선정하고 물방울의 형태를 잡고, 명암과 그림자를 그리고, 빛이 투영된 모습을 흰색으로 표현하는 물방울 작업 과정을 도슨트로부터 듣고 나니, 물방울 하나하나에 예술가가 삶의 고통을 정신적으로 승화하는 과정이 느껴졌다. 전시실 초입에 적힌 "FRESH AND SPIRIT"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물방울을 예술적 의미로 발견한 지 2년 만인 1973년, 김창열은 파리 놀 인터내셔널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당시 콩바지의 선임기자였던 알랭 보스케에게 호평을 받고, 살바도르 달리가 방명록에 "이건 페르피냥 역에 맞먹는 웅장함이다."라는 글을 남기면서 김창열은 큰 명성을 얻게 된다.
1980년대 중반 그의 작품은 또 한 번 변모한다. 김창열은 신문지 위에 물방울을 그리는 과정에서 글자와 이미지가 맺는 긴밀한 관계에 주목한다. 그에게 한자는 단순한 글이 아닌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인식하는 기호였다. 유년시절 조부로부터 배운 천자문을 쓰던 기억을 되살리듯, 물방울에 천자문을 새롭게 도입한 <회귀> 연작을 내놓는다. 기억을 담는 기호인 문자와 곧 소멸할 물방울이 기존의 관념과 달리, 물방울은 영롱한 형태를 드러내고 글자는 어렴풋이 사라지는 형태로 조우한다. <회귀> 연작은, 기존 회화의 문법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김창열의 미학적인 성취라 할 수 있다.
도슨트는 <회귀>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김창열 작가의 <회귀>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작품 속의 한자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자주 물었대요. 이에 김창열 작가는 한자를 그냥 이미지로 보라고 했죠. 그가 작품에 표현한 한자는 글자 자체의 의미보다는 형태에 주목한 것이라고요. 하지만, 작가는 죄(罪)나 사(死)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한자는 쓰지 않았다고 해요."
후반기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에는 다채로운 색채가 덧입혀진다. 푸른색과 노란색이 선명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니, 물방울을 통해 고통을 정화하고 비워내려 했던 작가의 깊은 사유와 예술적인 경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김창열 작가의 둘째 아들 김오안 감독은 2년 전에 김창열 작가의 작품과 물방울의 의미를 담은 다큐 영화를 만들었다. 영상관에서 그 영상의 일부를 볼 수 있었는데, 김창열 작가의 작품 세계를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었다.
8 전시실은 김창열 작가의 작업실과 예술의 단편을 담아 마련된 공간이다. 그의 작품과 기록들이 별책부록과 같이 전시되어 있다. 파리에서 만나 결혼한 프랑스인 아내 마틴과 찍은 사진, 파리 개인전에 대한 기사, 살바도르 달리의 방명록 등을 통해 김창열 작가의 발자취를 더 자세히 느껴볼 수 있었다.
7 전시실 출구 근처에 마주 보고 있는 두 작품을 설명하며 도슨트가 해설을 마쳤다.
"김창열 작가의 초기 작품인 <제사>입니다. 두 눈에 총탄의 흔적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죠? 그 아래에는 탱크가 지나간 자국이고요. 전쟁의 고통에서 울부짖는 듯한 고통스러운 모습이 잘 드러나있죠? 그리고, 마주 보고 있는 작품은 작가의 후반기 작품인 <회귀>입니다. 캔버스 바탕의 흐려진 한자 위에 영롱한 물방울이 하나 있네요. 두 작품 모두 붉은색의 색감은 비슷하지만, 이 작품 사이의 수많은 시간을 거쳐서 작가의 작품이 어떻게 변모되어 왔는지 이제 조금은 느껴지시지요? 이번 전시를 통해 김창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조금 더 깊숙하게 느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0여 년 간 수많은 물방울을 그리며 전쟁의 상처와 고통을 지우고, 그 속에서 무위와 동양 철학의 정신적 사유를 담아낸 김창열 작가. 그는 물방울은 충만한 것이며, 존재의 다양한 상태를 아우르는 상징적 의미라고 했다. 예전에 미술관에서 그의 작품을 보며 물방울을 정말 사실적으로 그렸다고 단순하게 느꼈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 상처와 고통을 예술혼으로 승화한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내년에 평창동에 김창열 미술관이 개관하면, 그곳에서 다시 그의 물방울을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