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 대한 이별과 새로움을 맞이하며

by 은향

가장 애청하는 라디오 방송이 있었다. 배우 강석우 님이 6년 동안 진행했던 CBS 음악 FM의 '아름다운 당신에게'라는 프로그램이다. 강석우 배우는 클래식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들려주는 곡에 대해 청취자가 알아듣기 쉽게 간단하고도 깔끔하게 잘 설명해 주었다. 가곡을 여러 작품 직접 작사 작곡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도 뛰어난 분이다. 무엇보다 그의 멘트는 편안하고 깊이가 있다. 청취자가 보내 온 글에 대한 코멘트에는 사람을 배려하는 태도와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담겨있고, 그의 인품과 연륜이 묻어 났다. 토요일마다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과 세상에 대한 깊은 생각이 담긴 에세이를 읽어준 후 음악을 들려주는 코너를 가장 좋아해서 그 시간에는 하던 것을 멈추고 초집중해서 듣곤 했다.


아침 9~11시. 별다른 일이 없을 때면 강석우 DJ의 '아․당'을 들으며 평안한 마음으로 오전 시간을 보냈었다.

"들리나요 선물받은 하루의 시작, 아름다운 당신에게~"

강석우 DJ의 이 멘트는 정말 소중한 선물을 받는 것처럼 따뜻하고 평안했다. 몇 년째 조용히 듣기만 하다가 작년에는 큰 마음을 먹고 어렸을 때부터 티비에서 보아 온 강석우 배우가 연기했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애청자로 잘 듣고 있다는 사연을 게시판에 장문으로 남기기도 했다. 매일 듣지는 못해서 내 글이 소개가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모른다. 소개가 안 되었더라도 청취자의 글을 대부분 읽는 DJ이니 내 마음을 전달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달, 갑자기 강석우 DJ가 하차했다. 부스터 샷의 후유증으로 시력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청취자의 글을 읽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했다. 게시판에는 청취자들의 아쉬움과 강석우 배우에 대한 걱정하는 마음, 갑작스런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겨운 슬픈 감정으로 도배가 되었다. 나 역시 갑작스러운 DJ의 하차에 섭섭하고 아쉬웠다. 마치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쭉 살면서 삶을 나누었던 죽마고우가 갑자기 머나 먼 외국으로 이민가게 되었다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슬프고 허전했다. 강석우 DJ는 내가 누구인지 존재조차 모를테지만, 나 혼자 충격받고 한동안 마음이 쓸쓸했다. 이별의 슬픔이 크다보니 혼자서 배신감에 휩싸여 '이제 그 프로그램 절대 안 들을거야.'라고 누구에게인지 모를 찌질한 보복을 생각하기도 했다.


습관이 무서운지라 나의 보복은 며칠 만에 혼자 막을 내렸다. 얼마 뒤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다시 그 시간에 라디오를 켰다. 목소리가 아주 매끄러운 젊은 남자 아나운서가 진행하고 있었다. 강석우 DJ와 같은 연륜도 클래식에 대한 깊이도 없는 젊은 아나운서의 진행이 뭔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라디오와 밀당 하듯 듣다 안 듣다를 며칠 간 반복하던 어느 날, 젊은 DJ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아직도 청취자들이 잘 모른다고 다시 한 번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제 이름은요. '도나우강' 할 때의 '강'에 '민물장어' 할 때의 '민'. CBS 아나운서 이강민입니다."


하루 이틀 계속 '아.당'을 듣게되면서 '어, 이 DJ 뭔가 색다른데?' 싶었다. 클래식 음악 DJ의 지적인 느낌이나 깊이는 없지만, 솔직하고 재치있는 그의 멘트에 점점 마음이 열렸다. 클래식에 대한 지식이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에서 하지 않을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발언하는 태도가 신선했다. 목소리와 딴판인 다소 경박한 웃음소리에 오히려 가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관대한 생각마저 들었다.


애청자층이 아주 두텁고 강석우 DJ에 대한 청취자들의 애정이 넘쳤기에 그 자리를 맡는 새 DJ의 마음은 얼마나 무겁고 힘들었을까. 기존 DJ만큼 할 수도 없고, 잘해봤자 본전도 못 찾는 자리. 그러니 솔직함과 겸손함으로 재치있는 입담을 가진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한 그의 전략(?)은 성공했다.


한편으로 이렇게 사람 마음이 간사한가, 강석우 DJ 떠난다고 그토록 슬퍼할 땐 언제이고, 그새 다른 DJ의 재치와 유머에 바로 넘어가 버렸나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얼마 후 인터넷에서 강석우 DJ의 시력이 많이 회복되었다고, 일시적인 백신 후유증이었던 것 같다는 뉴스 기사를 보면서 안도감이 들고 감사했다.


인생길에서 익숙한 것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경험은 늘상 있는 일이다. 졸업과 입학, 취업과 이직, 이사 등 삶의 과정마다 친구나 선생님, 동료, 이웃 등을 새롭게 만나고 떠나보내며, 이별을 받아들이는 성숙된 자세도 갖게 되고, 새로운 것에 대한 관대함도 갖추게 된다. 익숙한 것이 사라지면 그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것에 대한 낯선 마음이 커지고, 그 낯섬이 다시 익숙해지기까지 그만큼의 깊은 교류와 소통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며칠 만에 다시 라디오를 들으니 재치있는 새 DJ가 떠나고, 또다른 스페셜 DJ로 배우 장현성 님이 진행을 하고 있다. 또다시 새로운 진행자의 목소리에 매번 숙소를 옮기며 잠 들어야 하는 여행자의 밤처럼 낯설고 어색하다. 오랜 여행 끝에 우리 집, 내 방 침대가 한없이 그리운 것처럼 아직은 익숙함에 대한 미련이 더 큰 것인지, 강석우 님이 시력이 완전히 회복될만큼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올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며 일하게 되었다. 아직은 이 곳의 문화와 시스템, 사람들이 낯설고 어색하다. 낯섬이 익숙함이 되기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이 쌓여야 한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로 새롭게 만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낯섬에서 익숙함을 넘어 편안함에 이르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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