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흉'이 함께 한 날

뭉근했던 프러포즈 데이

by 코지

나와 F는 연애 초반부터 결혼을 염두에 뒀기에 순서가 다소 뒤죽박죽이었다. 사귐 > 결혼이야기 > 이사 > 결혼 순서였기에 연애와 동시에 결혼을 준비했다. 약 3개월은 연애를, 나머지 6개월은 결혼 준비를 진행했다. 결혼식을 스몰웨딩으로 하고 싶었던 나와는 달리 F는 제대로 하고 싶었기에 '그럼 제대로 하되 야외에서 재미있게 하자'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둘 다 일을 하며 이사와 결혼준비를 하면서 서로 예민해지기도 했고, 내가 종종 그에게 서운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제대로 된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프러포즈라는 형식보다는 진심이 먼저 느껴졌던 순간이 있기에 결혼을 결심했지만, 확실히 결혼의 스타트를 알리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남들처럼 화려한 프러포즈는 바라지 않았다. 그저 그의 마음이 느껴질 수만 있으면 그걸로 됐다.


몰랐었지만 프러포즈 데이였던 어느 날, 일을 하며 2도 화상을 입었다. 퇴근 5분 전 커피를 제조하다 뜨거운 물에 디인 것이다. 생전 화상은 처음이기도 했고, 평소 고통에 둔감한 나이지만 그 쓰라린 고통이 지속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아픔이 점점 더 커졌다. 약국에서 메디폼을 사 왔는데 보아하니 내 상처가 물집이 잡히고 심각해 보여 쓸모가 없었다. 다른 드레싱 폼이 필요해서 다급하게 F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는데, 평소와 달리 나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4-5통을 연달아했지만 말이다.


도움을 청하려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10분 내로 오면 진료를 볼 수 있다기에 1월의 한파에 외투도 걸치지 않고 달려갔다. 그 사이 F에게 전화가 왔고 알고 보니 애플와치를 두고 와서 장 보느라 전화가 왔는지 몰랐다고 했다. 나는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마음이 그러했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도움을 요청한 순간에 하필 전화를 못 받다니. 평소에는 잘만 받으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드레싱을 받는데 의사 선생님의 첫마디는 '아이고, 어쩌다 다치셨어요? 2도 화상입니다. 흉 질 수도 있겠는데요'였다. 속상했다. 일을 하며 그것도 퇴근 바로 직전에 이런 상처가 생기다니. 게다가 이 상처는 오래 남을 수도 있으니 더더욱 속상했다.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자 쓰라림이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처방해 준 항생제까지 먹자 화상의 고통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F가 장을 보고 돌아왔다. 그는 어쩌다 다쳤는지 물었고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나의 상처를 보더니 많이 안타까워했다. 화상을 입은 부위가 변색되어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다독이고 맛있는 저녁을 먹자고 했다.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만들어 주겠다고. 평소 요리를 안 하는 그이기에 내가 아파서 그런가 했더니 다친 것과 상관없이 오늘 식사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나에게 이 날 프러포즈를 할 요량이었다. 그래서 장도 보러 간 거였고. 그런데 하필 내가 일을 하다 화상을 입은 것이다. 그는 나에게 놀랐을 텐데 마음 좀 진정하며 쉬고 있으라고 했고, 나를 위해 아니 우릴 위해 묵묵히 맛있는 요리를 준비했다. 나는 하루 종일 놀란 마음을 달래며 잠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자 맛있는 음식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식탁에는 은은한 컬러감을 보이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고 우리의 추억이 담긴 영상이 플레이 됐다.


지인에게 부탁을 해서 우리만의 추억 영상을 만든 것이다. 프러포즈 날인 오늘을 위해서. 영상을 보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비록 오늘 화상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지만 갑자기 달달함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주식을 한 주 선물해 줬다. '많이 고민해 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가방이나 반지를 선물하지만, 나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걸 선물해주고 싶었어. 이게 내 스타일이기도 하고'라는 말과 함께.


주식 프러포즈라.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동안 내가 봐왔던 말랑말랑한 프러포즈와는 달리 다소 드라이한 느낌도 있지만, 그의 스타일 다워서 좋았다. '아마도 주식 프러포즈를 받은 사람은 전 세계에 10%도 안 되겠지?'라는 생각에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는 나에게 가방 회사의 주식을 선물해 줬는데, 나는 ‘다른 의미로 잘 들고 있을게'라고 대답했다.


낮에는 화상을 입고, 저녁에는 프러포즈를 받고. 안 좋은 일과 좋은 일이 함께했던 날. 내 인생에서 이렇게 큰일이 동시에 일어난 적은 처음이다. 좋은 일만 있는 인생은 없는 것처럼 비록 안 좋은 일도 함께였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여서 따뜻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마음이 뭉근해졌던 프러포즈 날. 결국은 길한 하루였다. 앞으로 우리의 결혼생활도 결국은 길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