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날의 술

다시,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3월에 내리는 봄눈 같은 막걸리 ‘서울 오리지널’

by 고지은

3월의 마지막 주말.

반팔에 청자켓만 입어도 충분한 봄이 온 줄 알았더니 청명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눈이 팡-팡- 쏟아졌다. 옷에 닿자마자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그런 눈. 돌이켜보면 내게 3월은 언제나 겨울이었다. 20여 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을 보면 나는 두꺼운 스웨터에 털 망토를 덮고 있었고, 10여 년 전 대학교 엠티를 다녀올 때에도 투박한 과잠 안에 반팔티부터 후드티까지 잔뜩 껴입고 있었다. 온 세상이 샛노란 개나리로 가득할 것 같지만, 월말이 되어서야 겨우 노란 꽃 몇 송이가 빼꼼 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을 생각하면 싱그러운 새싹과 화사한 꽃으로 가득한 봄의 이미지가 떠올리는 건 왜일까? 어쩌면 새 학년을 마주한 설레는 마음처럼 새 출발을 하고픈 나의 바람에서 비롯된 심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내게 3월은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해 보자’ 맘먹기 좋은, 기대와 설렘이 가득 찬 날들이었다.


3월이니까 시작해 볼까!

3월이니까 수영을 다시 시작해 볼까

3월이니까 아침 명상을 시작해 볼까

3월이니까 건강한 식단을 챙겨볼까


그러나 올 3월은 내게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지난가을, 무시하게 큰 번아웃이 찾아와 퇴사를 했다. 일하며 켜켜이 쌓인 스트레스로 가볍게 넘기기엔, 좋아하는 것이 한가득이던 나의 평범한 일상마저도 버겁게 느껴졌다. 틈만 나면 떠나던 여행은 상상만으로도 피로했고, 혼자보다는 여럿이 좋다며 거의 모든 주말마다 오랜 친구를 만나거나 새로운 모임을 찾아가던 일들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였으니까. 그때의 나는 무탈하고 평온한 일상을 원했다. 그렇게 집에서 온전히 쉬며 지낸 지 어느새 반년. 몇 월며칠인지 조차 점점 무뎌지고, 지금이 <3월>이라는 사실도 특별히 인지하지 않은 채 지낼 뿐이었다.





그날은 어느 양조장의 시음 행사에 가는 날이었다.

<서울 양조장>이라는 막걸리 브랜드. 이곳의 술 중 하나가 처음 출시 되었을 때, 또 사 먹기 위해 동네에 있는 편의점을 전부 찾아다닐 정도로 맛이 참 인상적이었다. 달콤한 멜론과 새콤한 포도를 요거트에 잔뜩 넣고 크게 한 스푼 퍼 먹는 기분이랄까. 마치, 골라 먹은 과일들이 이상적으로 잘 익어서 씹는 족족, <멜론>과 <포도>의 정석적인 맛이 날 때처럼 기뻤다. 달콤 새콤한 맛이 입안에서 오랫동안 굴러다녔다. 그때 그 감동을 잊지 못해 브랜드에서 운영하는 SNS를 자주 찾아가 거의 모든 포스트에 적잖은 반응하는 열혈 소비자가 되었다.

이번 행사엔 나처럼 술 그리고 이 양조장을 애정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술을 만드는 장소의 규모로만 말하면, 서울 양조장은 정말 작은 곳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양조장에 10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 양조장 크기만큼 놀라웠던 것은 ‘손맛’의 공정이다. 모든 단계에 필요한 최첨단 기계와 장비들을 갖췄지만 사람 손으로 직접 다루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막걸리를 거를 때에도, 병에 술을 담을 때에도. 술맛은 전혀 모르면서 전기로 그저 돌아가는 '기계'가 아닌 술을 온몸으로 즐기는 '사람'이 직접 한다고 했다. 그래야 정말 맛있는 막걸리를 매번 만들 수 있다고. 그렇게 만들어진 막걸리를 마트에 내보일 때까지는 대략 8개월 이상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보았던, 만들어지던 술들은 올해 말이 되어서야 마실 수 있다는 셈이다! 더 많은 막걸리를 더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좁은 공간에서 사람이 정성스레 짜고 담아낸 술이라니.


그러다 보니 막걸리 가격도 만만치 않다.

가장 저렴한 게 한 병에 1 만 원 중반이고, 프리미엄 라인은 25만 원이나 한다. 그날은 저렴이부터 고렴이까지 모두 시음을 할 수 있는 날이었다. 야-호! 눈여겨보고 있는 브랜드였지만, 그들의 25만 원짜리 술은 나도 처음 인지라 얼마나 들떴는지.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소리 지르리.

그간 마셨던 막걸리를 포함한 모든 술들과 비교하며 값비싼 가치를 최대한 느껴보려고 했다. 한 입을 머금는 순간, 아주 깊고 진한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와, 세상에! 설탕 한 톨 없이 오롯이 쌀이 발효하면서 만든 이 단 맛은 직접 먹어보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려울 거다. 알코올의 쓰고 매운맛이나 온기마저도 정말 부드럽게 녹아 있었다. 과연 무엇이랑 비교해야 이 맛을 더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눈을 감은 채로 음미하며 그 답을 찾아가는 중, 양조사가 내게 물어봤다.


"이 술은 어떠세요? 입맛에 맞으세요?"


나의 대답에 나도 놀랬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비슷한 가격대의 프리미엄 막걸리들과 <비교> 하며 극찬의 표현들을 쏟아 내었다.

OO 술은 알코올 향이 너무 튀어서 별로던데, 이건 훨씬 부드러워서 좋고요. △△ 술은 유명세에 비해 맛이 특별하지 않던데, 이건 풍미가 차원이 다르게 깊어서 좋네요!


"아 그러셨군요. 입맛에 맞으셨다니 너무 기쁘네요. OO 술은 얼음을 타서 마시면 좀 더 청량하게 즐길 수 있고요, △△ 술은 단맛은 적지만 한식과 페어링 해서 먹기 너무 좋더라고요. 이 술은 ⋯⋯. "


순간 나의 대답이 참 부끄러웠다.

나는 그 술 자체의 매력을 바라보지 못하고, 다른 것과 비교하면서 평가를 하려고 했을까? 굳이 왜, 다른 것을 깎아내리면서까지 이게 훨씬 좋다고 치켜세우려고 했을까? 매력적이고 내 취향이라고 강조하면서도 <1등>으로 꼽으며 담당자를 우쭐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오히려 담당자의 태도와 말은 참 근사했다. 담백하게 다른 술들의 매력을 알려주고, 그와 별개로 이 술에 담고자 했던 철학들과 정성들을 소개해 주었다. 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술을 만드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함께 술을 만들어가는 다른 브랜드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프로그램 내내 느껴졌다.





그날 마셨던 술 중 내가 가장 좋았던 건
(다행히도 25만 원짜리는 아니고) '서울 오리지널‘

무엇보다도, 버스에서 내려 양조장을 찾아갈 때 맞았던 그 눈처럼 입안에 푹신하게 내려앉는 술의 질감이 매력적이다. 이 부드러운 질감을 위해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정성스럽게 술을 거르는 거라고. 여름 참외의 향긋한 향과 은은한 단맛이 퍼졌고, 보글거리는 작은 탄산들이 입안을 간지럽혀 한 모금 한 모금이 참 즐거웠다. 뭐랄까, 땀을 흠뻑 흘린 뒤 마시는 탄산음료가 주는 짜릿한 보상이라기보다는, 아침 공복을 달래주는 보드라운 우유 같은 위로와 안부에 가까웠다. 이 술을 만드는 사람과 브랜드를 알게 되어서일까, 그들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고집스럽게 술을 빚는지 직접 봐서일까, 막걸리가 참 사랑스러웠다. 맛이 평범했다면 살짝 아쉬웠을 테지만, 풍미까지 특별하니 마음껏 좋아해도 될 만큼 아주 완벽했다. 가격은 1만 5천 원. 나의 소소한 행복을 위해 기꺼이 사 마실 수 있는 부담 없는 가격이다.


양조장을 대표하는 모든 술을 조금씩 맛본 후 추가로 더 마실 수 있게 해 주셨는데, 나는 그 ‘서울 오리지널’을 마시고 또 마셨다. 조금 전 부끄러웠던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었고, 번아웃으로 움츠러들어있던 나의 감각들을 어루만져 깨워주었다. 비교하고, 미워하고, 후회하던 마음은 이제 그만 놓아주자고. 모두가 인정하는 <1등>이 아니었다고 속상해 하지만 말고, 정말 애썼던 나의 시간과 애정을 보듬아주자고. 다시,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날을 마주해 보자고. 어깨춤에 차마 녹지 못하고 쌓인 봄눈쯤이야 가볍게 털고 걸어가듯이, 이젠 새로운 계절과 발맞춰 나아가보자고. 행사가 끝나고 ‘서울 오리지널’ 2병을 샀다. 기꺼이 시작하고 싶은 일이 생기는 날, 한 병씩 마셔야지!





3월이 지나고 드디어 봄.

3월의 마지막 주말에는 그렇게 눈이 내리더니, 4월의 첫 주말에는 부슬부슬 봄비가 내내 내렸다.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기 좋은 진짜 봄이 왔다.

그럼 무엇을 새로 시작해 볼까,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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