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 병쯤은 집에 구비해 놓는 이유
몇 년 전, 지금은 남편이 된 구남친과 통화를 하다 짜증을 버럭 냈다. 8년을 만나며 그의 약한 기억력쯤은 익숙했지만, 그날따라 그 말이 거슬렸다.
“그거? 내일 기억나면 가져갈게.”
아니, 본인이 기억력이 나쁘다는 걸 안다면 현관문에 메모를 남기든지 알람을 설정하든지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기억이 '나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가 무성의하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부탁인데 기억을 잘 못하는 게 당연한 거냐며, 그 한마디에 짜증과 화를 한껏 담아 쏟아내고 띡! 끊어버렸다.
에잇, 나 진짜 금주하려고 했는데 술 한잔해야겠다.
지금 당장 무엇이든 시원하게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은데, 냉장고엔 선물 받은 증류식 소주뿐. 그 당시 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같은 4층에 살았고, 맥주를 산다면 제일 가까운 편의점까지 족히 10분은 가야 했다. 그곳은 내가 정말 사랑하던 집과 동네였고 술이라면 언제든 기꺼이 사러 가는 나였지만, 그땐 왕복 20분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니 새빨간 화에 김이 모락모락 나기 시작했다. 평소에 집에서는 소주를 잘 마시지 않지만, 지금은 맛이고 뭐고 뭐든 마셔야겠다며 뚜껑을 땄다.
맵고 쓴 알코올 기운이 확 올라와 정신이 번쩍 든다. 소주를 들이켜기엔 그날따라 술맛이 너무 쓰디썼고, 그렇다고 홀짝이는 내 모습은 썩 멋이 없었다. 곁들여 먹을 거 뭐 없을까 하고 다시 냉장고를 열어보니, 구석에 숨어 있던 토닉워터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내겐 아주 신선한 바질이 있다. 내 맘대로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자!
나는 창가 농부.
봄이 오면 다이소에서 2천 원에 파는 ‘바질 키우기’ 키트를 사서, 손바닥만 한 창가에 놓고 바질 농사를 짓는다. 한 달 반 정도 지나면 따먹을 만큼 잘 자라고, 제법 수확량이 많아서 샐러드나 파스타에 넣어 먹으면 마치 내가 진짜 농부가 된 것 같이 뿌듯하다.
그 해, 처음 수확한 잎들은 그렇게 칵테일로 마셨지만 말이다.
우선 가장 좋아하는 유리컵에 얼음을 가득 채웠다. 냉동실에 있는 얼음을 부스러기까지 탈탈 털었다. 그리고 알코올 도수가 무려 40도가 넘는 끈적한 소주를 따랐다. 내가 술을 사랑한다고, 여기저기 하도 말하고 다녀서인가 언젠가부터 생일이면 제법 많은 종류의 술을 선물 받는다. 그중 하나인 안동소주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모든 것은 눈대중이지만 신중히 따랐다. 술은 소주잔으로 반 잔, 토닉워터는 맥주컵으로 반 잔 정도 되도록. 가장 싱싱해 보이는 바질잎 5개를 땄다. 그중 작은 이파리 서너 개는 술 안으로 푹 담기도록 넣고 휘휘 대충 저어주고, 크고 예쁜 잎은 완성된 술잔에 톡 올려줬다. 끝!
딱 37초 만에 소주 칵테일 완성.
머리가 띵할 만큼 차가운 소주 칵테일을 두 모금 꿀꺽. 꿀꺽.
그제야 뜨거운 분노를 들여다볼 이성이 돌아왔다.
하긴, 그리 급한 물건도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화가 날 일이었을까? 중요한 거였다면 남자친구가 어련히 알아서 미리 챙겨두었겠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우리의 대화였는데, 나는 왜 이토록 화가 난 것인가?
역시 참을 ‘인’은 세 번 외쳐야 하는 것이다. 그런 현명한 사람이 하루빨리 되기를 정말 바라지만 그전까지는 화내서 미안하다고 마음을 전하는 수밖에. 한 잔을 다 비우고 남친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까는 내가 갑자기 발끈해서 미안하다고. 그러나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핑계가 나의 작은 부탁을 가볍게 치고 지나가는 것 같아 속상했다고.
"나도 미안해. 사실 문 앞에 이미 챙겨두었는데 내일 급히 나가다가 혹시나 두고 나갈까 봐. 그럼 니가 서운할까봐 그렇게 말한 건데, 속상했겠네. 미안해."
아주, 시원하다. 상쾌하다. 경쾌하다!
소주의 매운 알코올은 달콤한 토닉워터의 탄산을 타고 입안에서 톡톡 터졌고, 향긋한 바질 향은 꽁꽁 언 얼음들과 함께 시원하게 퍼졌다. 적당히 차가운 이성과 팔팔 들끓는 뜨거운 감성 사이를 오가던 분노와 미안한 감정은 서서히 녹았다. 소주 칵테일 한 잔과 함께. 그토록 뜨겁게 달궈졌던 마음이 시원하다. 속상한 내 마음과 그 이유를 제대로 전해서 상쾌하다. 그리고 어쨌든 내일 남친을 볼 생각에 마음이 들떠 경쾌하다!
그날 이후 화가 나는 날에는 이 청량한 소주 칵테일을 먹으며 시원하게 풀어버리는 어른이 될 거라 다짐했지만, 사실 아직 그토록 속상한 적은 없다. 대신, 바질을 수확하는 날에는 그 술을 마신다. 화가 나서도 아니고 맥주가 없어서도 아니고, 정말 맛있는 술을 마시며 창가 농부의 수확을 기념하는 것이랄까? 말하자면, 바질 수확 기념주!
그리고 또다시 돌아온 봄. 며칠 전 역시나 나는 바질을 심었다. 5주 후면 소주 칵테일로 거하게 한잔할 수 있겠다. 그때 그 맛을 알려준 구남자친구 현 남편에게도 맛뵈어 줘야지. 때마침 지금 우리 냉장고에는 아직 뜯지 않은 <화요 17도> 소주가 있다.
-+추신+-
아주 가끔은 알코올 기운에 이성을 찾기도 하고 약간의 취기를 빌려 진심을 전하기도 한다. 그게 무슨 술이든! 역시 술 한 잔은, 단단하게 무르익어가는 내 인생에서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