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날의 술

풀숲에서 산딸기 따 먹어 본 적 있나요?

싱그러운 내추럴 와인 ‘말레뜨 레드’

by 고지은

와인 바틀샵으로 마실가는게 취미중 하나다.

지난번에 맛있게 마신 와인이 할인하는지, 새로 들어온 와인은 없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뿌듯하달까. 내가 주로 찾는 바틀샵들에는 와인마다 주인장의 테이스팅 노트가 적혀있는데, 그곳에 가면 한참을 놀다 나온다. 메모장에 적힌 그 맛을 상상하는 것은 실제로 마실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와인 취향이 생기기 전에는 패키지 디자인만 보고 먹곤 했고, 지금도 여전히 라벨이 예쁜 와인을 발견하면 아주 가끔 산다. 어쩌다 포장 뒤에 숨겨진 더 멋진 맛을 만나게 되면, 괜히 기쁨이 배가 된다. 역시 멋과 맛은 함께 가는 거라고, 와인은 바라보기만 해도 즐거워야 한다고, 그렇게 한껏 취한 김에 나의 안목을 드높이며 몹쓸 자화자찬을 하기도.





정말 오랜만에 라벨만 보고 고른 와인 한 병.

'말레뜨 레드'

라벨에 붙어 있는, 볼펜으로 직접 하나하나 그린 것 같은 드로잉 때문이었다. 내가 고른 그림은 삽(Piochard). 분명 같은 와인이지만, 다른 병에는 대여섯 가지의 서로 다른 농기구들이 그려져 있다. 과거 와인 메이커들이 직접 사용한 도구들이란다. (* 그 당시, 투박하지만 귀여운 맛이 있는 마카드로잉이나 가냘프지만 섬세한 매력이 있는 펜드로잉 중 무엇을 배워볼지 고민하던 중이라 그 라벨에 더 눈이 갔을 거다. )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그레나슈 품종으로 만들었고, 세계적인 와인 리뷰 플랫폼인 '비비노'에서 무려 4.3점을 받은 내추럴 와인이라고도 쓰여 있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라벨이 예뻐서 샀다.





어머, 이거 그 맛이다.

풀숲에서 먹었던 그 산딸기 맛.

아주 어렸을 때, 주말마다 가족들과 함께 아파트 뒷동산을 산책했다. 이웃 할머니들이 정성스럽게 가꾸시는 텃밭을 지나면 소나무 숲으로 이어졌다. 나는 텃밭과 숲속 사이를 지날 때 조금 무서웠는데 뱀이나 개구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행여나 개구리가 내 다리에 붙을세라 무릎을 높게 치켜들며 우스꽝스럽게 뛰어가곤 했다. 그렇게 이슬 맺힌 수풀을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화사하고 싱그러운 향이 은은하게 퍼져왔다.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져 설레기 시작한다. 몇 걸음 더 가면 길가에 딱 붙어 자라는 뱀딸기가 보이는데, 거기서부터 해가 강렬하게 내리쬐는 풀숲을 헤집고 들어간다. 무성한 초록 잎들 사이로 싱그럽게 피어있는 새빨간 산딸기! 바로 그 자리에서 섬섬옥수로 알알이 따다가 먹었다. 한 알 할 알 통통한 것이, 새콤달콤하게 아주 잘 익었다. 우리가 산책하는 시간 중에 어쩌면 그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풀숲을 돌아다니며 입안에서 톡톡 터트려 먹던 달콤한 산딸기의 맛, 한참을 잊고 지냈었는데.





와인 한 모금 머금은 순간,

그때 그 행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짧고 통통했던 손가락으로 한 알씩 따먹던 그때 그 산딸기를 한 번에 세 움큼을 녹여 먹는 것 같다. 내추럴 와인이라면 쿰쿰할 거라는 나의 편견과는 달리, 싱그러움으로 가득하다. 반병쯤 마셨을까, 새콤한 매력에 빠져 한껏 감동하고 있는데 살짝 떫은 느낌을 뒤늦게 느꼈다. 이건 마치 산딸기인 줄 알고 냉큼 따먹었는데, 알고 보니 향기롭기는 산딸기와 비슷하면서 떫기만 했던 뱀딸기를 먹었을 때처럼.

혼자서 거의 한 병을 비워내며 어린 시절, 그 동네에서 함께 보낸 가족과 옛 친구들도 떠올렸다. 그들은 이 산딸기 맛을 기억하고 있을까?





늦봄과 초여름 사이,

풀숲에서 산딸기를 따 먹어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다.

있다면 바로 그 맛을 다시 느껴보라고, 없다면 이게 그 맛이라고 감히 추천한다.

이제는 바틀샵으로 산책하러 가는 게 취미인 어른이 되어, 가끔은 엄마아빠 그리고 두 동생과 함께 동네를 거닐던 날들을 이렇게 추억하다니. 올해는 여름이 일찍 찾아온다는데, 그전에 산딸기가 흐드러지게 열렸을 고향집 뒷동산에 가봐야겠다. 말레뜨 레드 한 병도 챙겨서!





-+ 추신 +-

예전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이제는 누군가에게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치 말레뜨 레드가, 20여 년 전 산딸기를 따먹던 그날들을 선명하게 그려준 것처럼.


몇 년 전 평택의 어느 바틀샵에서 처음 사먹고, 그렇게 반해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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