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날의 술

육체노동 후 마신 술은, 살 안 쪄.

맵싸리한 마라샹궈에는 달큰한 약주를

by 고지은

내가 운전을 하다니.

7년 전, 주차를 하면서 브레이크와 엑셀의 위치가 순간적으로 헷갈려 건물을 쾅 -. 전면이 유리로 된 한쪽 벽을 산산조각 냈다. 동승했던 부모님부터 심지어 피해를 보신 건물주까지, 아무도 다치치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지만 그때 나는 다짐했다. 앞으로 내 삶에 운전은 없을 거라고.


하고 싶은 게 많고, 가고 싶은 곳이 많은 나지만 운전하지 않아도 튼실할 두 다리가 있기에 문제없었다. 걸어서 50분 거리까지도 조금 일찍 나와 산책 삼아 걸어가면 되었고, 학창 시절엔 2시간씩 버스 타고 통학했기에 대중교통을 타는 것도 익숙했다. 게다가 감사하게도 내게는 운전을 잘하고 좋아하는 짝꿍이 있다.

그랬던 내가, 순전히 나의 의지로 운전을 하다니.





취미가 있으면 좋은 건,

그동안 몰랐던 세상으로 확장하며 살 수 있다는 거 아닐까?

집에서 사부작사부작 막걸리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전통주와 관련된 각종 행사를 찾아 나섰다. 그중 가장 특별한 경험은 < 108 주모 토종벼 술빚기 > 다. 오랫동안 잊혀있던 토종쌀을 연구하고 복원해서 농사짓는 ‘우보농장’에서 막걸리 빚을 사람을 108명이나 모집한 거였다. 나는 그저 쌀과 누룩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게 신나서 기쁘게 신청했다. 게다가 쌀 앞에 ‘토종‘이라는 웅장한 수식어가 붙어 있으니 특별하지 않은가. 프로젝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108 종류의 토종쌀을 108명의 주모에게 각각 나눠주었고, 총 108가지 막걸리가 탄생했다. 막걸리는 몇 차례에 나눠서 시음회를 열며 선보이고 있는데 하나같이 다 다른 맛과 향을 내서 정말 신기하다. 나는 단순히 막걸리를 만든다고 해서 참여했지만, 쌀 자체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함께 했다. 나와 같은 애주가부터 동네 정미소 사장님, 인류학자, 소규모 농부들이 모여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토종벼에 관하여 진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인연이 된 우보농장. 나는 그곳에서 기획한 다른 행사들까지 차츰 눈여겨보게 되었는데, 곧바로 신청한 건 < 내논갖기 > 이다. 토종벼로 직접 농사짓는 1년 체험 프로젝트다. 막걸리 빚는데 필요한 쌀을 직접 재배해 볼 수 있는 것. 그렇다. 집에서 사부작사부작 막걸리 빚던 내가, 벼농사를 직접 해보겠다고 운전대를 다시 잡은 거다.





사실 내 꿈 중 하나는 농부다.

살면서 한 번도 논일 밭일을 해본 적은 없지만 과수원 농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늘 말하고 다녔다. 어렸을 적 논두렁 옆 낮은 빌라에 살며 한 학년에 반이 겨우 2개 있는 조그마한 시골 학교를 다닌 것 때문일까, 전원생활에 대한 향수와 동경이 있다. 내 손으로 직접 씨 뿌리고 물 주고 수확한 과일과 야채들로 음식을 해 먹는 삶이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하지만 종자회사 연구원인 남편은 종종 농민들과 밭일을 하기도 하는데, 내 꿈을 들을 때마다 그건 영화 속 얘기라고 웃어넘긴다. 내가 상상하는 모습은 영화 <리틀포레스트> 속의 아름다운 그림이라며.

그래 지금이다! 직접 해보자, 딱 1년이지만 늘 그렸던 그 꿈을 펼쳐보는 거야.





농부로서 첫 출근하는 날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이 아직 자고 있을 때 먼저 일어나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이 말하길 1시간 10분 거리지만, 고속도로 출구를 잘못 나오는 바람에 2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다. 장화부터 챙이 넓은 모자까지 비장하게 갖추고 갔지만, 첫날엔 그저 운동화만 있어도 충분한 작업이었다. 작년에 수확한 벼의 씨앗 중 실한 것만 골라내는 작업. 볍씨를 물에 풀었을 때 텅 비어서 바로 떠 버리는 것은 버리고, 알맹이가 꽉 차 가라앉은 것만 골라내 심어야 농사가 잘 된다고 했다.

쭈그려 앉아서 물이 담긴 큰 대야에 볍씨를 후드득 부어 놓고, 뜰채로 서너 번 돌려 물에 뜬 볍씨를 꺼내 버리고, 바닥에 가라앚은 볍씨를 모아 다시 볍씨 주머니에 담아준다. 이 단순한 작업이 벼농사의 시작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하니, 다리에 쥐난 줄 모를 정도로 얼마나 집중했는지 모른다. 나 처음하는 것 치고는 제법 빠른데? 내심 뿌듯해 하면서 말이다.


안내받은 딱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팔만 요리조리 돌리며 애써 하고 있으니, 함께 작업하던 농부 선생님께서 두 손을 내저으시며 쉬엄쉬엄하라고, 사실 좀 대충 해도 된다고 호탕하게 웃으신다. 그토록 열심히 하면 허리만 아플 뿐이라고.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인데 빨리 해치우는 건 하나도 중요치 않다고. 오늘 일할 시간과 일은 딱 정해져 있으니 쉬엄쉬엄 해도 충분하다고. 서너 주머니 하고 일어나 마당에 핀 꽃구경도 했다가, 또 서너 개 하고 담배도 피웠다가 해야지 농사를 오래 한다고. 그게 농부 근력이라고 했다. 나는 담배는 피우지 않으니, 덕분에 마당을 가득 채운 들풀들을 잔뜩 구경했다. 애기똥풀, 토종 민들레, 제비꽃, 질경이, 냉이꽃. 벌써 씨앗을 맺은 토종 민들레의 씨앗은 휴지에 감싸 챙겨 왔다. 베란다 텃밭에 심어 볼까 하고. 앞마당은 없지만 민들레 핀 베란다 정원을 상상하니 그 또한 낭만적이잖아.


마당에서 갓 수확한 달래로 된장국을 끓여 주신 따끈한 점심을 먹고 나니 뜨거운 햇살을 즐길 여유까지 생겼다. 우리에겐 나른하다면 낮잠 좀 자도 된다고 하셨지만 농부 선생님들은 또 부지런히 작업장으로 향했다. 모판을 만들어 볍씨를 뿌려보자고.

말하자면 오전에 골라둔 씨앗들을 화분에 심는 과정이다. 이번에도 유의사항은 간단하다. 볍씨 하나하나가 생명이니 거친 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조심히 다루면 된다. 씨앗을 골고루 뿌려주고 물을 흠뻑 주고 따뜻하게 온도 조절이 되는 창고에 넣었다. 이젠 그저 싹이 잘 나길 바라며 기다릴 뿐.


생경한 경험이라 신이 났던가, 나 또 너무 열심히 해버렸다. 이틀 연속으로 농장에 다녀갔으니 말이다.





처음으로 혼자서 왕복 100km 운전을 하고, 안 쓰던 근육까지 끌어와 8시간 동안 꼼지락거렸더니 더 잘 먹어야겠다.

첫 회사를 다닐 때부터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하고 집에 온 날엔 늘 마라샹궈를 먹었다. 저녁시간이 지난 줄도 모르고 애쓰며 일한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거였다.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 마라샹궈 1인분을 후다닥 주문한다. 새로운 맛집을 찾아가는 게 취미라 동네에 자주 가는 단골집은 별로 없지만, 마라샹궈만큼은 이 집을 고집한다. 3인분 같은 1인분에, 맵기도 딱 좋다.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적당히 얼얼하고, 얼추 한국화가 되어 꼬릿한 향신료 향은 심하지 않다. 고수와 푸쭈는 많이, 김밥햄과 라면은 추가! 나의 마라샹궈에는 이것이 킥이다.

매운 음식에는 탄산은 적고 달콤한 술이 좋다. 탄산이 강한 맥주보다는, 알코올의 뜨거운 온기가 강한 고량주보다는 약주가 제격이다. 약주는 막걸리를 만들다 그 매력을 알아버린 술이다. 막 빚은 술을 거른 후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두면 아주 맑은 층과 탁한 층이 나뉜다. 맑은 층만 따로 떠다가 한 달 뒤에 먹으면 그렇게 달짝지근할 수가 없다. 쌀의 단맛이 이렇게 맛있었던가. 정기적으로 시켜 먹는 마라샹궈를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하여 나는 약주를 계속 빚기로 한다. 단짠의 매력만큼 ‘단맵’의 매력도 엄청나다.



장롱면허를 탈출한 나를 위해 건배. 오랫동안 꿈꿨던 농부의 삶에 한 발짝 다가간 나를 위해 건배.

겨우 이틀 일손을 도운 정도에서 감히 말해보건데 농부 선생님들은 위트가 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도 멈춰 쉬어가는 것도 나의 컨디션에 맞게 조절하는 여유가 있다. 내가 안되면 너에게 기꺼이 도움을 청하고, 내가 여력이 되면 좀 더 하는 여유가 있다. 이것이 더불어 사는 낭만적인 삶 아닌가!


맵싸리한 마라샹궈와 달큰한 약주에 차츰 취해가며, 오늘의 일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소중하고 기특한 것이라고 벌써 아름답게 추억하다가 문득, 그토록 건강하게 먹고 일했는데 이 시간의 이 성대한 야식이 걱정이 된다. 아니야 괜찮아, 진한 육체노동 후에는 뭘 먹고 마셔도 살 안 쪄. 그렇게 농장을 다녀온 늦은 밤엔 내리 마라샹궈를 주문하고, 약주를 흠뻑 마셨다지.




추신.

며칠 전은 모내기를 하는 날이었다. 내 몸이 성치 않아서 대신 일할 일꾼인 남편과 함께 갔다. 가만보면 다 때가 있다. 주변에서 아무리 운전은 해야한다 말해도 듣지 않던 내가 스스로 운전대 잡고 싶은 날이 오고, 농부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벼를 심어야 하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어떻게든 해결된다. 운전해서 갈 수 없다면 일찍 나와 걸어가면 되고, 나 혼자서 할 수 없다면 짝꿍과 함께 하면 된다. 그러니 지금처럼 이렇게 좋아하는 거 하면서 소소한 꿈 꾸면서 큰 걱정 없이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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