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식혜처럼 달콤한 위로가 되어줄, 호랑이 생막걸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전환이 필요해.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오후, 주섬주섬 옷을 입고 부암동으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사람 많은 핫플은 싫고, 옛날 통닭이나 뜯으며 스트레스를 날려보자고. 부암동에는 요새의 세련된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 투박한 감성을 그대로 살린 옛날 통닭 맛집이 있다. 겉바속촉의 정석이다.
“나는 괜찮아, 너 맥주 마셔!”
비 오는 날 굳이 드라이브하자고 꼬신 건, 장롱면허 소유자였던 나. 언제나 그랬듯 운전은 남친의 몫이다. 그간 쌓인 업무 스트레스를 투덜대며 쏟아내는 것과 시원한 맥주를 꿀떡꿀떡 마셔재끼는 것은 내 몫. 나 또한 괜찮다고 몇 번을 거절했지만 닭다리를 바사삭 뜯는 순간, 남친이 알아서 맥주를 주문해 준다. 역시 나를 너무나도 잘 아는 고마운 사람.
맥주 딱 한 병에 치킨을 야무지게 뜯고 지도 앱에 아직 등록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신상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까지 한 잔 걸쳤는데, 혼자 집에 들어오니 조금은 외롭고 아쉬운 밤.
오늘은 토요일. 돌아보니 이번 주 내내 자정이 다 된 시간까지 야근을 했고 내일은 주말 근무다. 오늘이야말로 오롯이 쉴 수 있는 유일한 날. 어제까지만 해도 '토요일엔 빈둥빈둥 누워만 있어야지. 14시간 잠을 자는 것도 좋겠다' 다짐하며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렸는데. 막상 뒹굴거리고만 있기엔 너무나도 소중해. 그냥 이불속으로 들어가기엔 못내 아쉬운, 여름날의 토요일 저녁 8시 45분.
그래! 한 잔 더하자.
빗소리가 듣기 좋아 열어 두었던 창문을 꼭 닫고 에어컨을 켠다. 아빠가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 샀다며 보내준 대용량 자몽 향 바디워시로 씻고 나온다. 아무리 더워도 씻을 땐 찬물보다는 뜨거운 물이 좋다. 우디 한 향수를 목과 손목, 가슴에 한 번씩 뿌려준다. 상큼한 바디워시 향과 어우러져 마치 오렌지 밭에 들어온 착각이 든다. 흐으으음~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젖은 머리는 빠르게 탈탈 털고 에어컨 바람으로 천천히 말릴 거다.
며칠 전 야근을 하고 마시고 남겨둔 막걸리를 꺼낸다. 평소라면 막걸리 한 병쯤이야 혼자서도 거뜬하지만 그날은 정말 피곤했는지, 한 잔의 위로주만 마신 채 냉장고 깊숙이 넣어두었다.
코로나 19 유행으로 집콕생활이 길어지면서 혼술과 홈술이 늘었고, 특히 막걸리에 홀딱 빠졌다. 마트에서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은 막걸리 코너. 아마 대형마트건 동네마트건 마트에 파는 웬만한 전통주는 거의 다 마셔봤을 거다. 어떤 날에는 혼자서 두 병을 다 마시기도 했다. 막걸리는 병뚜껑을 따면 무조건 그날 다 마셔야 하는 줄 알았다는 핑계랄까.
호랑이 생막걸리는 지금까지 제일 많이 마신 막걸리 중 하나일 거다. 무슨 술 좋아하냐고 물으면, 맥주, 막걸리, 소주, 와인이 아니라 '저는 원래는 맥주덕후인데요, 요즘은 호랑이 생막걸리를 가장 많이 마셔요'라고 할 정도.
어찌나 자주 사 마셨던지 나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도 찾았다. 이 술은 병에 담긴 지 2주 정도 지났을 때 마시면 그 맛이 가장 좋다! 마트에는 보통 2~3일 차 막걸리가 들어오니 열흘 정도만 냉장고에 두고 기다리면 된다. 톡톡 튀는 탄산의 소리도 경쾌하다. 단맛은 적당히 무르익는다. 반주보다는 디저트에 어울리고, 퇴근 후 한잔으로는 두말할 나위 없지. 원래 달달한 술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호랑이 생막걸리는 이맛에 먹는다. 마치 할머니가 담근 식혜처럼 사랑스러운 추억의 단맛!
20여 년 전, 술이라는 매력적인 존재를 전혀 모를 때, 나는 친할머니가 만든 식혜를 좋아했다. 할머니 옛날 집에는 장독이 있었다. 장독에서 장을 담갔는지, 김장 김치를 보관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느 겨울엔 살짝 살얼은 식혜가 있었다. 할머니는 '다라이'라고 부르는 대야로 식혜를 휘휘 저어 나와 동생에게 한 컵씩 퍼주셨다. 우린 차디찬 식혜를 호호 불며 쌀밥이 가라앉기 전에, 살얼음과 함께 홀짝홀짝 마셨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웠지만 가늘고 긴 여운이 있는 단맛이 잊히지 않는다. 아주 추운 날 나의 입김이었는지, 장독 안에서 응축된 식혜의 차가운 기운이었는지, 김이 솔솔 나던 식혜의 맛. 할머니는 장독 없는 아파트로 이사 가신 지 오래, 어쩌다 가끔 옛날 집 이야기가 나오면 혼자서 흐뭇하게 떠올리던 추억이었다. 할머니 집의 장독, 그리고 겨울날의 식혜.
1년 전, 호랑이 생막걸리를 처음 마시고 정말 깜짝 놀랐다. 아니 이거,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식혜 맛이잖아. 그날부로 이 술은 나의 <최자술>이 되었다. ‘최’고로 ‘자’주 마시는 ’술‘.
비가 무진장 많이 내리는 어느 여름, 토요일.
소소한 행복이 있는 보통의 날이었지만, 이 취기는 좀 더 달콤하게 기억하고 싶은 맘이다. 할머니 집에서 식혜를 홀짝였던 그날을 선명하게 추억하는 것처럼 언젠가 오늘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웃고 있을까.
아, 슬며시 배도 부르고, 살짝 알딸딸하니 기분도 썩 좋다. 그래 이제는 자러 가야지.
일요일 오전 12시 1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