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스카, 다시 말해서 사랑 아닐까
우리 사회에는 벽이 있다. 이 사회에는 계층이라는 것이 있고 거대한 벽(어쩌면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이 있다. 실제 벽도 있고, 심리적인 벽도 있다.
이를 통과하기 위한 요구사항들도 있다. 토익… 집… 혼수품… 스펙… 자격증(이건 이해가 되기도 하다…) 시험성적… 다양한 문서, 출입증 등이다. 집값, 어떤 시험 등은 막막하기도 하며, 일그러진 욕망을 가진 문지기도 있지만, 주님께 나를 낮춰서 문을 통과하고, 벽을 넘어가고, 그러고 나서 주님께 등 돌리지 말고, 발견한 보물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자는 것이 이 글의 주제다. 꼭 안 읽으셔도 괜찮다.
적당한 벽은 보호의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일부 사람들이, 심지어 문지기조차, 이 시스템 속에서 잠깐의 보호가 풀리는 상황이 오면, 타인의 신체나 타인의 것들을 탐하려고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직원, 감독, 검사관, 검사원, 담당자(?) 등의 이름(???)의 문을 지키는 이들 중엔 양의 탈을 쓴 이리들도 있는데 그 어떤 일그러진 욕망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공익이나 공공의 목적 아래 다소 시커먼 목적을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관문(???)에서 버티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 알고 계신다. 왜… 이런 일들 그냥 두고 보실까… 주님의 마음은 주님께서만 알고 계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좋은 씨를 뿌린 땅에서 자란 밀이라는 비유로 말씀하신 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가지 않도록 어쩌면 최대한 우리 모두를 보호하시거나 인내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마태오 복음서 13장의 가라지의 비유처럼... 달리 말하면 우리가 너무 주님의 인내와 진노를 무시하며 행동한다는 것...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마태 13,24-30)
김대건 신부님이 주인공인 영화 <탄생>에선, 신부님이 국경의 검문을 어찌어찌 통과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극장에서 그 장면을 보고 어쩌면 빠스카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빠스카에 대한 성구를 찾다가 모세가 생각났다. 스스로 건너감 보다… 주님께서 건너가도록 해주시는 신비함… 주님께선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들은 바다를 건너가게 하시고, 뒤따라간 파라오의 군대는 바다에 갇히게 하셨다. 주님께선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으신다. 우상을 섬기고 이스라엘인들을 괴롭힌 이집트인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마태 23,13)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셨다. 마태오 복음서 23장에 꾸짖으시다는 표현이 나온다. 내가 언급한 사람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율법의 기본 계명이 아니라, 후차적이고 부차적인 갖가지 규정으로 사람들의 신심을 궁지로 모는 것에 대한 깊은 아픔 또는 심판 예고로 이어지는 분노라 한다(가톨릭 주석성경 마태오복음서 23장 11번 및 15번 주석 참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본인들이 더 지키지 않는 또는 지키기에 많은 시간과 자원이 필요한 갖가지 규정들을 신심으로 모여든 주님의 백성들에게 무작정 갖다 댄 것이다. 어쩌면... 괴롭힌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실 때 적절한 시간에 심판하신다고 하셨다. 다소 억울한 면도 있지만, 정죄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올려드리기 위하여 노력한다... 나는 나의 죄를 돌아봐야 하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이 회개이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주님 아닌 우상을 내가 섬기고, 나도 지키기 어려운 잣대를 타인에게 내밀며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았는지, 주님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려고 하지 않았는지, 내가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았는지...
하느님께서는, 내가 나의 죄를 돌아보고 회개하고, “내 덕분“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건너가게 해 주시려고, 기다려 주시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빠스카. 주님께서 건너가게 해 주시는 것. 내가 넘어가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넘어가게 해 주시는 것… 주님 덕분에 알게 되었고, 여전히 알려주고 계신 예수님의 지혜...
그리스도님의 사랑과 지혜로 문제를 해결해 가시는 분들이 신부님들이고, 반면에 나는 자신의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타인에게 상처 줄 때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내가 그 문지기였을 수도 있다. (나에게) 중요한 건 그 벽을 넘어가려 한다는 점이고, 내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점을,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를 낮춘다. 문지기이기 전에 한 인간이고, 우리 사회의 어르신분들이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이렇게 해도 참 쉽지만은 않을 때(어쩌면 나에게 자신을 낮추는 것에도 하루당 한계치가 있는 듯…)가 있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주님께는 한계가 없으시리라.
주 그리스도님의 대리자인 사제의 직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신부님들은 언행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시며 살아가실 것이다(내가 잘 모르지만은…). 성당에 다니며 느낀 점은 사제의 직무는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세상에서도, 낮은 나는 높은 직위가 아니라도,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내가 사제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청년회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부분이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 사제분들이며, 한 분이신 주님을 통하여 나는 할 수 있는 낮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청해드린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 14, 15-17)
그 벽도, 일부 문지기들의 일그러진 욕망도, 사탄의 누룩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하는 힘은,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다. 하느님께서 갈대 바다를 가르신 분이시라는 것을 아마 누구나 안다.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다… 내가 이를 잊지 말도록(260104에 추가).
그리고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루카 22,17-20)
하느님께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다. 하느님께 빠스카 음식에 대한 감사를 드리시고 이를 제자들에게 나누셨다. 반면에 내가 벽을 넘으려고 하는 이유에는 세상적인 면들도 있다. 통과하지 못한 과정을 통과하려거나 생존하려는 마음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도 있다. 주님께 순종하기 위한 마음도 분명히 있다.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성체성사가, 하느님께서 외아드님까지 내어주신 끝없는 사랑이라는 점과 그리스도님의 한없이 깊은 이해와 순종이라는 배움과 깨달음… 최후의 만찬이 만찬이 아니었다는(The Last Supper라는) 대구에서 주임신부님이 주신 강론에서의 배움과 사랑. 크루아상을 여러 개 사가신 한 직원분의 마음에서 배운 사랑. 배고플 때 먹고 있는 음식을 나눈다고 생각해 보면… 작은 음식을 나누는 것도 쉽지 않다.
이 모든 갈등 속에서도 주님을 잃지 않고 사랑을 생각하며 힘을 내려는 이유는, 배고픔의 해결이란 자신의 높임과 육의 부분으로 시작해서, 성령님의 이끄심과 도우심을 통해 음식의 나눔이란 자신의 낮춤과 영의 측면으로 건너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도의 힘으로. 부족한 나의 기도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드리는 기도를 기억하며…
주님께 또 맡겨드린다. 정죄하지 않기를 청해드려야 함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는 나의 죄를 봐야 한다. 복수와 심판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심판하시리라.” 하고 말씀하신 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히브 10,30)
주님께서 훈련의 기회로 바꾸어주신 것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보며. 그들을 겪으며 내가 가려는 목적지와 목표, 나의 태도를 개선할 수 있었음도 깨달으며…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마태 22,35-40)
참고자료
(260205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