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가장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영국의 브루더호프처럼 삶을 나누고, 프랑스의 떼제처럼 경건하게 예배하고, 미국의 아미쉬처럼 소박하게 살고 싶었다. 내게 그런 꿈을 꾸게 만들어준 이의 손을 냉큼 잡았다.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내 생애에 이를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손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열매를 맛볼 수 있을꺼야. 라고 위로하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로부터 만 8년이 지나, 나는 그 곳과 완전한 결별을 선택했다. 청년의 때, 뜨겁게 투신했던 삶의 현장을 떠난다는 게 어디 쉬웠겠나. 이곳에 찾아온 수많은 손님들의 눈물앞에 함께 울어줬던 일도, 수백명의 손님의 식사를 책임졌던 일도, 풀만 무성하게 자랐던 허허벌판에 집을 지었던 일들도, 마치 흐릿한 꿈처럼 느껴졌다. 돈을 받고 한 일도 아니었고, 어떤 기록으로도 남겨지지 않은 일들이었다. 세상 앞에서 나는 무일푼에 자격증하나 없는 이름만 덜렁 존재하는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내가 과연 세상에 나가 적응이나 할 수 있을까? 그 과정을 통과하며 원치 않게 몸으로 새겨진 문장이 있었다. 정말 필요할 때 나를 지키는 건 공동체가 아니라 오롯한 나의 힘과 의지라고.
...
올 여름부터 마을 식당에 손을 조금씩 보태기 시작했다. 일이 어렵진 않았다. 오히려 소소한 노동을 핑계로 이웃들과 시덥지 않은 농을 던지며 근심을 푸는 때가 기다려지기도 했다. 어느날 식당을 운영하는 동생으로부터 여기서 함께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다. 아니, 난 그냥 이정도 선이 딱 좋아. 그래도 형, 아이들도 있는데 생활비를 채워야 하지 않아? 괜찮아, 난 자격증 공부해서 그쪽으로 갈꺼야. 형, 그럼 공부하는 기간에라도 해봐.
그에게 자꾸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샌가 식당에서 밥을 짓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사실 그의 말보다, 때때로 그가 내민 붕어빵, 아이스크림 등이 더 눈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마침 함께 밥을 짓다 그가 무심한 듯 건넨 한 문장이 마음에 콕 박혀서 떠나지 않던 참이었다.
"형이 이곳에서 밥을 지으며, 지나온 시간과 해원하면 좋겠어"
해원이라니, 동학을 공부하며 숱하게 보아온 단어였지만, 그것이 나의 일상과 진지하게 만난 건 처음이었다. 지난 공동체의 삶을 통해 공동체를 떠난 것도 나였지만, 다시 공동체로 살겠다고 기어들어온 것도 나였다. 누군가에게 더는 기대며 살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사실 어느때보다 이들의 온정에 기대고, 또 젖어들기를 원하며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소중하지 않은 시절이 어디있겠냐마는, 올 해는 특히 잘 기억하고 싶다. 힘든 시절을 보냈던 내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주었던 그의 따뜻한 마음을 고이게 두지 않고, 필요한 곳에 흘릴 줄 아는 넓은 품으로 자라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