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 연습

불편함이 주는 따뜻함

by KokoA

저는 간호사예요. 간호사는 매 근무 교대 시 인수인계를 해요. 간호사 세계에서는 옛날 물건 취급을 받는 카덱스라는 것이 있어요. 카덱스에는 대상자의 기본적인 인적사항과 과거 병력 및 현병력, 가족력 등 대상자에 대한 정보가 있어요. 입원 시 받은 정규 처방과 필요시 처방도 있고 근무별 간호사가 따로 받은 오더가 있을 때도 있어요. 오더는 물론 대상자에게 일어난 이벤트도 기록되죠. 그 기록은 연필로 해요. 오더가 바뀌면 지워 수정하고 이벤트가 끝나면 지워 정리하죠. 카덱스로 인계를 할 때 글씨를 못 쓴다는 지적을 종종 받았어요. 지적을 받은 후에도 흘려 들었어요. 수기 차팅도 하지 않는 전자 차팅의 시대에 인쇄하면 되는 걸 했죠. 굳이 손글씨를 고칠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저는 불편하지 않았거든요. 그랬던 제가 손글씨를 고치겠다 마음을 먹어요.


언제나 계기는 소중한 존재예요. 얼마 전 저는 결혼을 했어요. 남편과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매일 즐겁게 지내요. 친구는 많으면 좋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아이를 원하게 되었어요. 한동안 글을 쓰지 않다가 아이에게 사랑을 남겨 주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활자도 좋지만 아이에게 손글씨도 주고 싶었어요. 그러기엔 지금의 글씨는 부끄러웠어요.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악필이면 읽고 싶지 않을 것 같았어요.


요즘은 남편이 손편지를 써주는 일이 뜸하지만 연애 때 종종 써주던 손편지 속 남편의 글씨체를 보면 글씨체에서도 힘이 느껴져요. 제눈에 안경이라고 하겠지만 글씨까지 잘생겼더라고요. 반면 저는 필압이 약하고 글을 작게 쓰는 편이라 알아보기 힘들 때가 있어요. 글씨를 못 쓴다는 지적을 받을 땐 대부분 흘려 쓰거나 폰트가 작아서 일 때가 많았어요. 손에 익은 글씨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조금이나마 스스로를 의심할 때 저를 격려하던 요가의 말을 떠올리는데 제 아이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Start small. Stay consistent. Feel the change. That's the yoga way.

작은 것부터 시작해라. 꾸준히 해라. 변화를 느껴라. 그것이 바로 요가다.


대개 사람들은 거창하게 시작하고 싶어 하고 금방 결과가 나타나길 원해요. 사실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하면 쉽게 변하지 않거든요. 결과가 나타나는 것도 시간이 걸리고요. 대부분 느껴지지 않는 변화에 좌절하고 포기해 버려요. 꾸준히 하지 않았더라면 저도 요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했을 거예요. 요가는 아프기만 하고 재미가 없다고요. 요가는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면 한 번에 몰아서 할 때보다 훨씬 토대가 탄탄해요.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잔근육이 붙어요. 언젠가 안되던 동작이 되는 순간이 와요. 작은 변화를 쌓아서 큰 성장을 만들어요. 더딜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돼요.


소중한 존재가 생기면 변해야 해요.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좋은 방향으로 성장해야 해요. 요가가 알려주었듯 성장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아요. 미리 해두어야 해요. 그래서 매일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손글씨를 연습하고 있어요. 매주 같은 문장을 쓰며 글씨체를 비교해 봐요. 미세한 변화지만 좋아지고 있었어요. 요가와 손글씨의 경험을 통해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었어요. 세상은 빠른 것이 다 좋은 줄 알지만 느리게 얻을 수 있는 것도 분명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몸은 똑똑해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번 해내면 성공하는 방향으로 가요. 요가와 공부 모두 그랬어요. 셀 수 없이 구르고 넘어지며 해낸 자세는 몸이 조금 뻣뻣해도 해내요. 직접 손으로 쓰며 공부한 것은 머리뿐만 아니라 몸이 기억해요. 많이 쓸수록 더 기억에 남아서 잘 잊히지 않아요. 그 과정에서 성실함이라는 강력한 무기도 얻게 돼요.


성장과 성실함 외에도 서른 중반에 접어든 제 세대는 손글씨의 의미를 알아요.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학교를 다닌 디지털 세대이면서 종이책을 보며 직접 손으로 써 공부를 하는 게 익숙한 아날로그 세대이죠. 제 세대는 불편함 속에서 자란 편리한 세대예요. 통신의 발달로 친구들과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손편지나 쪽지로 마음을 주고받는 것에도 익숙했어요. 우리는 그 불편함이 주는 따뜻함을 알고 자란 세대예요.


반면 아이가 자랄 세대는 그런 불편함보다 태어날 때부터 컴퓨터와 스마트폰 AI 등이 주는 편리함이 더 익숙할 거예요. 어쩌면 편리함에 가려진 채로 그런 불편함을 영영 모르고 자랄 수도 있어요. 그런 불편함이 주는 따뜻함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어요. 세상에는 불편해서 좋은 것들도 있거든요.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편지를 생각해 볼까요.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인쇄한 것이나 AI에게 쓰게 한 것보다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직접 손으로 쓴 것이 더 좋지 않나요. 깨끗하게 인쇄되었다 해도 인쇄된 편지에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아요. 아무리 조리 기구가 발달해도 엄마 손맛은 나지 않는 것처럼요. 그 손맛은 온도 차이예요. 기계에는 온도가 없거든요. 사람에게만 온도가 있어요. 그래서 사람의 손으로 하는 모든 것은 귀해요.


손글씨는 아이에게 주고 싶은 귀한 따뜻함을 의미해요. 사랑은 표현해야 비로소 사랑이에요. 사랑은 세상을 살아가며 풍파를 만났을 때 버티게 해주는 힘이에요. 아이에게 풍파가 왔을 때 언제든지 펼쳐볼 수 있도록 아이의 손에 사랑을 쥐어주고 싶어요. 집에 편지지가 잔뜩 있어요. 언젠가 글을 잘 쓰는 친구가 좋은 책을 예쁜 편지지에 필사해서 선물한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거든요. 참 근사하다 생각해 사두었죠. 제 아이에게 하고 싶어질 줄은 몰랐네요. 다음 오프 때는 서점에 들러야겠어요. 손글씨 연습 겸 필사 편지를 할 좋은 책을 고르러요.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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