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니스의 아침과 '만의 천사'

순례라기 부르기엔 조금 느슨한 희년의 여행기

by 느루숨

2025년 10월 21일~ 11월 6일까지의 기록


2025년 10월 22일

니스의 아침과 ‘만의 천사‘


니스의 첫날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우리는 다음 날 아침을 계획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했다.

아침 6시 30분, 숙소를 나섰다. 니스 해변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책로로 내려섰을 때, 차가운 해풍이 먼저 얼굴을 스쳤다. 도시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지만, 바다는 이미 하루를 맞고 있었다.




니스의 아침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해변 산책로에는 조깅하는 사람들과 출근길을 서두르는 이들이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고, 그 규칙적인 발걸음은 파도 소리와 겹쳐 조용한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도시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각자의 속도를 존중하는 듯,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시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2회차_니스해변조깅.jpg 니스 해변 산책로



나는 그 곁을 천천히 걸었다.

여행자의 걸음이었지만, 풍경은 관광객을 앞세우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달리는 사람도, 걷는 사람도 모두 같은 아침을 살고 있었다. 니스의 바다는 여전히 잔잔했고, 하늘은 서서히 밝아오며 밤의 흔적을 말없이 지워가고 있었다.


2회차_니스해변벤치.jpg 니스 해변



해변을 따라 걷다가 니스의 랜드마크인 'I Love Nice' 표지판을 찾았다. 사진 속에서 수없이 보았던 그 상징적인 장소가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기대했던 상징은 사라져 있었고, 그 빈자리가 오히려 말을 걸어왔다.


잠시 머뭇거리다 산책로 벤치에 앉아 있던 노신사에게 물었고, 그의 긴 설명은 휴대전화 번역기의 도움으로 조금씩 의미를 드러냈다. 그 과정은 느렸지만, 덕분에 니스가 자신의 상징을 바꾼 이유가 천천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바다를 향해 선 조형물이 있었다. 장 마리 폰다카로의 '만(灣)의 천사(L'Ange de la Baie)'. 2016년 7월 14일 프랑스혁명기념일 밤, 영국인 산책로에서 발생한 테러로 희생된 86명을 기리는 작품이었다. 파도 모양 받침대 위, 하트 안에는 이름들이 담담히 새겨져 있었고, "우리 천사들을 기리며(en mémoire de nos anges)"라는 문장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새인 형상은 특정 인물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다. 감싸안는 듯한 곡선이 파도의 흐름과 닮아 있었고, 그 안에서 보호와 연대, 상처를 넘어 다시 일어서려는 희망이 함께 읽혔다. 이름들이 말을 걸진 않았지만, 쉽게 외면할 수도 없었다.


2회차_니스해변_만의천사.jpg 만(灣)의 천사(L'Ange de la Baie) by 장 마리 폰다카로(Jean-Marie Fondacaro)



번역기의 문장은 어색했지만, 조형물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상할 만큼 분명했다. 이곳은 이제 사진을 찍는 자리가 아니라 기억 앞에서 잠시 고개를 낮추게 되는 자리였다. 가벼운 상징 대신 침묵의 형상을 남긴 니스의 선택이, 이 도시를 더 깊이 이해하게 했다.


마세나 광장으로 자리를 옮겨 아침을 먹었다. 갓 구운 크루아상의 바삭한 겉면을 한입 베어 물자 버터의 풍미가 입안에 퍼졌다. 뜨거운 카페 크렘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제법 굵은 빗줄기가 광장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2회차_니스영국인거리_솟대.jpg 7대륙의 대표자들(Seven Representatives of the Continents) by 스페인 출신 조각가 하우메 플렌사(Jaume Plensa)



광장 한가운데 태양신 아폴로를 형상화한 분수가 서 있었고, 그 주변에는 7 대륙을 상징하는 현대 조형물들이 솟대처럼 솟아있었다. 비를 맞으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그 형상들은, 서로 다른 형상들이 말없이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비가 잦아들자, 사람들의 발걸음이 다시 겹치며 광장은 일상의 리듬을 되찾았다. 주차장으로 향하며 유명하다는 빵집인 블랑제리 장노(Boulangerie Jeannot)를 찾았다. 평일 아침인데도 현지인과 관광객이 뒤섞여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방금 먹은 크루아상도 훌륭했지만, 긴 줄의 길이는 이 도시의 아침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렸다. 아쉬움은 잠시 남았지만, 그 또한 이 도시의 아침 속에 묻혔다. 우산을 접고 출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 하나둘 문을 여는 상점들 사이로 니스의 아침은 관광이 아니라 생활의 시간으로 흐르고 있었다.


니스는 처음부터 이탈리아로 향하는 경유지로 생각했던 곳이었다. 니스 코트다쥐르공항에서 시트로앵 장기 리스 차량을 인수하기 위한 선택이었고, 일정은 그에 맞추어 짜여 있었다. 그럼에도 지중해를 머금은 새벽 해변과 아침 광장을 지나며 이 도시에 하루쯤 더 머물지 못하는 것이 조용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계획은 정해져 있었지만, 니스는 그 계획을 흔들 만큼 매우 아름다웠다.


에어프랑스로부터는 끝내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들의 가방이 도착했다는 문자도, 추가 안내도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가방이 없다고 하루를 멈출 수는 없었다. 불편은 감수하되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 마음을 접어 두고 우리는 다시 길 위에 올랐다.


다음 목적지인 절벽 위의 마을 에제로 향하였다. 해발 427미터, '독수리 둥지'라 불리는 이곳은 전망보다 골목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마을이었다.


좁은 돌계단을 오르며 발밑의 감촉에 집중했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발걸음이 닳고 닳아 만든 매끈한 표면. 황톳빛 벽과 자갈길은 중세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골목과 골목을 잇는 상점과 집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조화롭게 이어져 있었다.



2회차_에제골목길.jpeg 에제의 골목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지중해는 햇빛을 받아 깊고 검푸른 빛을 반사했다. 절벽 위 집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냈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몸을 비틀며 오르는 동안, 골칫덩어리 무릎이 많은 자선을 베풀어 골목길 가파른 계단을 생각보다 수월하게 올랐다.



2회차_에제절벽지중해.jpg 에제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지중해



모나코로 향하는 길은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차량이 몰렸다. 천천히 흐르는 차들 사이로 작은 나라의 하루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나코 대성당 인근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지상으로 올라서자 화창한 파란 하늘이 우리를 맞았다. 가족 단위와 단체 관광객들로 주변은 이미 북적이고 있었다.


대성당 안에는 그레이스 켈리 왕비를 비롯한 왕족들의 묘소가 안치되어 있었다. 영화배우에서 왕비가 된 삶의 궤적은 화려한 대리석과 조각들 속에서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단 주변의 조형물들은 정교했지만 과시적이지 않았고, 그 앞에 서자 마음은 뜻밖에도 고요해졌다. 제단 앞에 앉아 조용히 묵상하고 성당을 나섰다.



2회차_모나코_그레이스켈리묘.jpg 모나코 대성당(Monaco Cathedral) 내부에 위치한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의 묘비



왕궁은 의외로 수수했다. 화려함과 절제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에서 이 작은 나라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균형을 짐작할 수 있었다.



2회차_모나콩궁.jpeg 모나코 왕궁



왕궁 앞 광장 주변 벤치에 앉아 내려다본 항구에는 대형 크루즈선과 수많은 요트가 정박해 있었다. 그리고 언덕을 따라 이어진 집들은 나라 전체를 하나의 산등성이 마을처럼 보이게 했다. 지중해 특유의 날씨인 듯한 적당한 기온과 화창한 하늘이 지중해의 검푸른 바다와 함께 어우러져 평온함이 느껴졌다.



2회차_모나코_항만.jpg 모나코 항


모나코 역시 니스처럼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곳이었다. 좁은 골목 사이로 펼쳐지는 지중해의 풍광,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현대적 요트들이 만드는 대비가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라스페치아 숙소의 체크인 시간을 지켜야 했기에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모나코를 벗어나며 라스페치아까지의 거리를 재차 확인했다. 약 200킬로미터. 숙소 체크인 시간을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모나코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던 중, 아침에 받았던 숙소 측 문자를 뒤늦게 확인하게 되었다. 체크인 방법과 함께 적혀 있던 체크인 가능 시간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촉박했다.


점심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배는 고팠지만, 도중에 시간을 내기도 애매했다. 결국 점심은 건너뛰기로 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지중해 풍경이 공복마저 잊게 했다.


해가 저물 무렵 라스페치아에 도착했다. 숙소는 아피타카메레 루나마르(Affittacamere Lunamar). 호텔보다는 현지인의 집에 머무는 듯한 소박한 공간이었다.



2회차_라스페치아거리.jpg 라스페치아 밤거리



저녁은 지역 맛집인 Bif La Fiorentina에서 티본스테이크와 와인으로 마무리했다. 적당히 구워진 스테이크에서 육즙이 배어 나왔고, 토스카나 와인의 묵직한 타닌이 고기의 기름기와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점심을 거른 탓에 배가 더 고팠던 걸까. 아니면 긴 하루를 견뎌낸 후의 피로가 입맛을 더 살렸던 걸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날 저녁 식사는 하루를 충분히 보상받는 맛이었다. 결핍이 만족을 더 깊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2회차_라스페치아_티본스테이크.jpg 라스페치아 Bif La Fiorentina의 티본스테이크


2회차_라스페치아_티본스테이크01.jpg.jpeg 라스페치아 Bif La Fiorentina의 티본스테이크


이날은 부족함 속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법을 배운 하루였다.




이날 하루는 결국, 니스 해변에 서 있던 ‘만의 천사’ 앞에서 하나로 모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추는 자리가 아니라, 기억 앞에서 잠시 고개를 낮추게 하는 자리.


니스는 자신의 상징을 지우고 대신 침묵을 남겼다.


가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고, 일정은 빠듯했지만, 그날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에제의 골목과 모나코의 제단, 라스페치아의 저녁 식탁까지, 하루는 부족함 속에서도 끝까지 이어졌다. 돌아보면 이 날은, 무엇을 더 얻은 날이 아니라 어떻게 기억하며 지나갈 것인지를 배운 날이었다.


그래서 길은 그날, 더욱 또렷해졌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