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국진 Jan 19. 2023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부담스럽다.

나는 언제든 방 뺄 준비가 되어있다.

그들의 당당함이 좋다. 나도 그랬다.


"안녕하십니까, 50기 신입사원 예능PD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환영합니다!"


어려운 전형을 통과하고 입사한 후배들의 당당함에 즐겁고 반갑다.

올해는 공사창립50주년의 해다. 그러고보니 후배들의 기수가 50기인 것이

당연스러운데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10년차이 후배를 받고 나서부터는 후배들 기수도 가물가물해지고

별 감흥도 없었다. 31기인 나는 어느덧 예능센터에서 상위 기수 20퍼센트 안에 드는

노땅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들도 나를 모르고 나도 꼰대놀음에 끼고 싶지않아

아예 관심이 없어진거일수도 있겠다.

다른 기업으로 따지면 차장이나 부장급의 위치라 더더욱 아재로 보이기 싫었던 모양이다.

어쨋든 그들은 새로운 책상에 앉기도 전에 편집실로 촬영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왜 들어왔을까? 굳이 귀한곳에 누추한 분이...


KBS의 위상이 많이 내려앉고 종편과 케이블, OTT가 대세인 지금,

그들은 더 인기가 많고 새로운 프로그램에 큰 제작비를 투여하는 다른 방송사를 두고

이런 큰 플랫폼에 6차에 가까운 힘든 전형을 뚫고 굳이 들어왔을까?

예상해보건데

예능피디를 준비하던 와중에 공교롭게 KBS공채가 떠서 지원했거나

다른곳은 경력자만을 원하기에 이리로 왔을 가능성이 있겠다.

한 때는 다른곳에서 경험을 쌓고 들어와도 될까말까한 지상파는 이제

신입으로 들어와 좋은 대우와 경력을 인정해주는 곳으로 떠나기 위한 정거장일수도 있겠다.

회사를 사랑하면 할 수록 더욱 회사에 쓴소리를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현실을 직시하고 대비해야 반등을 하게 되는데 일개 사원인 내게 보기엔

우리 조직은 너무 크고 무거워 움직임이 둔하고 티가 안나기 때문일 것이기에

계속해서 쓰는 나의 글은 어쩌면 반성문이 될 수도 있겠다.

신입사원은 결국

 여전히 이곳은 자리를 내주지않은 채 빡빡하게 레귤러 편성된, 사람들은 잘 안보는(?) 프로그램을 맡은 선배들과는 가벼운 카톡인사로 끝내고

창문도 없는 편집실 인생을 살아갈거라 본다.

회사 콘텐츠가 탄탄하지 못할 때 들어온 후배들에게

그래서 더 민망하고 부담스럽다.


나는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뭘 남겨주겠다는 생각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 싶다.

싹 비워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엔 더더욱.

그 옛날 복도에 지나다니는 김석윤, 이명한, 나영석, 신원호 선배를 바라보며

마치 연예인을 보듯 신기하게 쳐다보았던

당시의 신입사원들에겐 두 분으로 대표되는 선배들에게 배울것이 많았다.

기획과 편집의 노하우, 촬영, 섭외 그리고 리더십과 매너, 자막쓰는 방법까지...

시청률이 40프로에 육박한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연출자에게 그들도 기대하는 바가 컷을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스타피디라 불리는 선배들이 대부분 이직을 했고

그들의 노하우를 일부 받았거나 어섬프레 보았던 피디들이 남았고

관성적으로 돌아가는 프로그램과 그 루틴한 제작시스템만 남았다.


"무슨 프로를 하고 싶으니?" 물어보기도 두렵다.

"걍...뭐....시키시는 거 아무거나..ㅎㅎ"

없다는 표현을 에둘러 말할까봐 더욱 두렵다.

버라이어티 전문, 드라마 타이즈 전문 피디를 꿈꾸던 나도 어느샌가 4년째 공연을 제작하는

사람이 되었기에 딱히 조언하기도 힘들다.

후배와 함께 일해본지도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것도 이유다.

일요일 프로그램을 맡아본지가 너무 오래되어 늘 나혼자에 외주피디들과만 일했기 때문이다.


후배없이 일하다보니 나의 노하우들은 혹은 잔소리들은 외주제작사 피디들에게 계속되었고

말하지않아도 안다는 초코파이같은 애정은 모두 외부사람에게만 전달되었다.

종편이 생기고 나서 그런 외주피디들의 실력은 상향 평준화가 되어 지금은 높은 몸값을 받으며 일한다.

그러다보니 나는 이른바 자알 키운 혹은 잘나가는 외주제작사와는 일을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에 빠졌다.


이런 상태에서 언젠가 한번은 만나게 될 신입사원들에게 무엇을 또 알려줄 수 있겠는가...

그저 그들은 수년간 인력난에 허덕이는 주요 버라이어티에 막내 조연출로 일한 후에나

볼 것이 뻔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이름을 외우는 건 안해도 될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그런 후배들에게 지금의 노하우를 전해주는 일도 힘들겠다.  

후배가 들어왔다고 뭘 해줘야 하나 싶다가도 이런 이유로 또 가마니가 되게 된다. 쩝...


거대 공룡의 존재감을 다시 보여 줄 기회- 신입들아 힘내줘! 나는 빠져줄게.


공룡이 살았던 중생대에는 최상위 포식자로 먹고 살 걱정이 없었겠다.

거대동물이 사라지고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요즘에는 공룡대신 대기업과 자본력이 갖춘자들이

먹고 살 걱정이 없었겠다.

허나, 가족도 친구도 적어지고 아파트, 회사도 작아지고 심지어 월급도 작아지는 요즘

덩치가 큰 지상파 방송사들은 방향타를 잃어버렸다.

누군가는 다시 키를 잡고 어딘가로 가야한다.

뭘 어딘가인가...돈을 찾아 트렌드를 찾아 가야하지!

신입사원들에게 기대하고 또 기대본다.

나 대신 그 길을 찾아주기를...


그리고 또 기대해본다. 자리를 지키려고만 하는 리더십을 과감히 버리고

자리를 내주려고 하는 진짜 리더십의 등장을...

하루를 일하고 잘리더라도 후배들의 방패막이가

되는 선배들의 진짜 의미를...


마땅치 않는 노하우를 주느니 조용히

다 비워주고 빨리 입봉시키고 빨리 조연출을 털게 할 것이며

내 의견보다는 신입사원의 의견위주로 된 프로그램을 하게 두고 싶을뿐이다.

제발 내 입에서 "라때, 거봐, 그럴땐, 이럴땐" 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칭찬만 하는  고개만 끄덕이며 나누고 싶다.

책임만 지는 선배이고 싶다. 후배들은 늘 옳다.

다소 투박해도 후배들이 정답에 가깝다.

나는 언제든 뒤로 빠져줄 준비가 되어있으니 나 대신 마음껏 밤세주길! 

다시 돌아올 지상파의 젊은 시청자를 위해...

"1544 못난놈 못난놈"


작가의 이전글 웃기지 않는 요즘 예능PD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