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수평적 직장문화에 대해
"부장님은 무슨...앞으로 형이라 불러"
"네 부장님!" ;;;
KBS는 신입사원으로 들어오면 3개월간 예비사원 제도라고 해서
이른바 수습사원이라고 불리우며 여기저기 이 프로, 저 프로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님들과 함께하며
프로그램 녹화장이나 편집실 등을 졸졸 쫓아다니는 시기가 있다.
이럴 때는 보통 선배님들과 함께하는 식사자리와 가벼운 술자리까지 동행하며
제작의 노하우부터 시시콜콜한 개인사까지 듣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대학생티가 나는 회사원도 학생도 아닌 이 애매한 시점에 10년이상 차이가 나는 대 선배님에게
혼이 났던 적이 있다.
"부장이라 하지말고 형이라 불러라!" 라고 혼났다.
학생때는 1년 선배라도 꼭 님자를 붙여 깍듯이 호칭을 불렀던 나에게 10년차이, 20년차이가 나는
직장상사에게 형이라는 호칭은 한동안 입에 머금지 못했다.
그렇게 몇번의 술자리와 몇달의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형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을 때
"왜 호칭을 편하게 놓으라고 하는거야? 이것도 테스트인가?" 했던 궁금함이 해소 되었다.
호칭이 편해지니 일할때도 서로가 편하게 대할 수가 있었고
직장동료에게는 하지못할 것 같은 개인적 고민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더라.
군대에서 전우애라는 게 있었다면 다소 예술적인 업무와 같이 느꼈던 방송제작의 일이
호칭만 바뀐 후에는 일종의 형제애 비슷한 감정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마치 이곳에서 일한다는 것이 아티스트의 삶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 또한 지근거리에 있는 후배들과는 형동생으로 편하게 지내게 되었고 동료가 이성일 경우에만
선배로 불리며 지내왔다. 그러나 나는 10년차 이상의 여자선배들에게도 누님이라는 호칭을 쓰며
최대한 가깝게 지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곧 회사생활 20년차가 되어가는 지금, 우리회사는 조금씩 호칭문화가 달라짐을 느끼고 있다.
후배들도 형이라는 호칭보다 팀장님, 부장님, 국장님이라는 호칭이 당연하고 더 익숙해지고 있는게 보인다.
이유가 뭘까?
대기업이나 비슷한 방송사의 경우 직위를 부르지않고 누구누구 님으로 부르고
심지어 영어 예명을 써서 편하게 부르고 있다는 뉴스도 봤다.
수직적인 위계관계에서 나오는 수동적인 업무방식을 이른바 <원팀>으로 만들기 위한
자구책일것으로 이해한다.
우리회사도 아마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그런 호칭의 문화가 바뀌어 가는걸 느끼고
또 아쉬워하는 것인지 생각한다.
예능국 최초의 여자국장이 등장해서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럼 남자부장들에게는 편하게 호칭해야하지만
그들 모두에게 직함을 부르는 느낌이 드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곰곰히 생각하다 형들을 떠올리니 머리에 흰눈이 쌓여있었다.
봄인데도 형들의 머리는 하얗다.
세월가는 줄 모르고 일하게 되는 방송환경이라지만
"그래...신입사원이 보기에도 형이라 부르기 좀 힘들겠다!"
"오히려 아빠가 편하지;;;"
어려 근거를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적어도 나는 거리감있게 느껴지는 직장상사로 보이지않고 형들에게 배운 나의 노하우와 친절을 좀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1. 형들의 급격해진 노화
2. 관리자가 되면 바뀌어지는 의상(청바지,운동화->캐주얼 자켓과 구두)
3. 술자리가 없어진 사회(칼퇴근의 생활화)
4. 빡빡한 자기스케줄이 우선이 된 문화와 존중
5. 줄어든 소통
6. 도저히 웃고 다닐 수 없는 킬러콘텐츠의 부재, 삭막해진 예능국 사무실
몇가지가 생각이 났다.
기여코 근거들을 끄집어내니 어느정도 수긍이 되었다.
회사업무외의 삶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다보니 오히려 근무시간에 마주치는 직장상사가
편해지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봤기때문이다.
한 팀으로 일하지 않는한 퇴근시간이후 SNS로 연락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지고
당장 할 일이 없는 후배들과 함께 할 퇴근후 벙개도 없어지고
회식문화 또한 사라지고 있기에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케이블, OTT, 유튜브까지 확장된 플랫폼에서의 경쟁으로
성공한 콘텐츠, 즉 킬러콘텐츠의 부재로 잔치(회식)를 벌일 수 없으니 더더욱
조직의 문화가 딱딱해져가는 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청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밤새 편집해 떡진 머리를 하고 회사를 돌아다니던 자유로움과
소수의 채널만 존재해 두자릿수의 근접한 시청률이 나오던 세상이 사라져
딱딱하게 느껴지는 지금의 조직문화가 아쉽게 느껴졌는데
주52시간의 정착으로 밤새 편집하는 문화가 아닌 일찍 출근해 일찍 퇴근하는 현상으로 인한
긍정적인 효과로 발생되는 결과라 느껴지니 글을 써내려 갈 수록 한탄이 아닌 인정으로 바뀐다.
"타자가 어떻게 매번 홈런을 치니?"
시청률로 좌절하는 동생들에게 위로해주던 이런 이야기는 응원이 아닌 비난처럼 느껴지게 되고
"어떻게 매번 기회를 주니 할 때 잘해야지, 한 번을 보면 그 다음이 보여"라는 말이 난무하는 시기가 왔다.
기회는 한 번뿐인 세상이 왔다.
프로그램 입봉(*조연출 생활6~7년을 거친 후 메인피디가 될 때 만느는 첫 프로그램)이 성공적이면
좋은 조건을 받은 타 회사로 이직하는 세상이다.
사표가 쉬운 세상이 왔고 정년퇴직을 하는 것이 명예가 아닌 세상이 왔다.
좋았던 시절을 다 가고
창의력보다는 자본의 논리로 달라진 직장의 문화로 조직은 더 딱딱해져가는데
마땅한 대책은 없다.
형이라 동생이라 부르던 편한 호칭으로 일반 회사원과는 다른
독특하고 창의적인 집단으로 인식되던 나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회사는 그냥 말그대로 회사일 뿐이라는 사람들의 논리도 이해가 되는 요즘이다.
꼰대가 되기 싫어서 든 생각인데 후배들은 어쩌면 나를, 선배들을
입사하자마자 꼰대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달라진 지상파 방송사의 오늘이다.
평범한 직장문화로 바뀌어 지는 창의적인 공장이다.
씁쓸한 마음에 친한 형에게 연락이나 해 봐야겠다.
*아래 동영상을 보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