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마스크의 재인식
김숙
코로나19의 창궐로 미치도록 피어 흐드러졌던 봄날은 화중지병이었다. 정지용 시인의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우는” 여름 또한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다. 이러다 코로나19 퇴치와 관련한 뾰족한 대책도 없이 찬 바람 부는 계절이 금방 닥칠 것 같다. 막연한 불안감에 행여 하는 마음으로 미디어에 촉각을 세우다 보건용 공적 공급 마스크 5부제를 종료한다는 보도를 접했다. 7월 11일까지는 기존 공적 판매처에서 개수 제한 없이 살 수 있고, 12일부터는 약국뿐 아니라 마트와 편의점, 온라인에서도 원하는 만큼 구매할 수 있다고 하였다. 1주일에 1억 장 이상을 생산할 수 있어 시장 공급체계가 원활해졌기 때문이었다.
보건용 공적 공급 마스크 5부제, 세상에 없던 말이다. 지난 3월 5일 정부가 발표한 ‘마스크 수급 안정화 대책’에서 나온 말이다. 생년의 끝자리 수 지정에 따라 남편은 목요일, 나는 월요일이 구매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몇 주 동안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다. TV에서 보이는 마스크 대란 장사진에 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통업을 하는 지인이 30개들이 한 상자를 구해 준 덕분에 우선 버텼다. ‘외출을 삼가며 최대한 아껴 써야지.’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온종일 실황중계하듯 전해지는 코로나19 소식의 끝을 알 수 없어 불안했다. 마스크를 좀 더 구해 놓아야 할 것 같다고 하자 남편은 무색하리만치 화를 내었다. 그게 무슨 부당한 거래에 동조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5부제가 시작된 지 한 달쯤 지난 토요일 오후 남편과 함께 효자동 서부시장 쪽으로 산책을 하였다. 왕복 한 시간 정도 소요될 거리여서 가벼운 운동 삼아 갈 수 있었다. 주말에는 누구나 마스크를 살 수 있는 날이니까 “나가는 김에 마스크도 구매합시다.”라고 말해 보았다. 어쩐 일인지 별말 없이 수긍하였다. 서부시장 근처에 가끔 들르는 약국에 도착하였다. 우리 앞을 가로질러 신분증을 내민 여인은 있었으나 줄을 설 필요는 없었다. 보유하고 있는 마스크도 넉넉한 것 같았다.
바이러스가 비말로 전파된다는 주장이 나오자 보건용 마스크 착용은 필요 불가결하게 되었다. 나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배려하는 절대적인 보루로도 빠르게 장착되었다. 마스크의 안과 밖이 이승과 저승을 가를 것처럼 중요시되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WHO의 ‘감염병 세계적 유행’의 선포가 있을 때까지도 마스크 사용에 부정적이라고 하였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든가 “건강한 사람의 마스크 착용이 바이러스 확산의 위험을 낮춘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라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마스크에 대한 서양의 문화는 환자나 범죄자 또는 테러리스트의 전유물처럼 여긴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또 다른 불신의 사례가 있었다고도 들은 바 있다. 그때를 혹자는 중세시대라고도 하고 또는 17세기부터라고도 하는데 역병을 막는 의사들이 사용했다는 새 부리 마스크가 있었다. 쥐벼룩이 옮겨 감염되는 흑사병을 그 당시의 의학 이론은 냄새가 원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새 부리 모양의 마스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부리 끝부분에는 각종 향료나 허브 등을 넣고 작은 숨구멍을 냈다. 그것들이 공기를 소독하고 정화시켜서 감염되지 않을 것으로 알았다. 요즈음 방독 마스크의 정화통 같은 역할을 기대했다. 또 그 마스크는 눈 부분까지 밀폐하기 위해 고글 형태의 유리나 안경을 부착했다. 의사의 복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으로 된 원피스였고 옷 표면은 공기가 통하지 않게 밀랍으로 코팅했다. 환자와 직접 접촉을 피하려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다. 신발은 구두나 장화를 신었다. 이런 새 부리 마스크와 원피스 차림 의사의 모습은 괴기스럽기까지 하였다. 일종의 방호복이었지만 완벽한 밀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쥐벼룩들은 빈틈을 노려 침투하였고 의사들도 별수 없이 병에 걸렸다. 흑사병이 코로나19처럼 비말이나 호흡기를 통한 감염병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새 부리 마스크는 효과가 없었을 것이고 마스크를 신뢰하지 않게 된데 일조하였다는 말에 수긍이 갔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만 일상이 적응되지 않던 지난 몇 달은 방콕 1열이 되어 포노 사피엔스의 대열에 속한 것 같았다. 스마트폰 활용에 둔감하면서도 자꾸 손이 갔다. 검색하는 곳마다 코로나19에 대한 이런저런 소식과 정보들이 울울창창하였다. 그중에는 마스크와 관련한 내용도 한몫하였다. 마스크가 부족하다는 사연을 듣고 돕고자 몰래 가져다 놓은 선행의 기사를 읽으면 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다가, 재봉틀로 천 마스크를 만드는 영상을 볼 때는 먼지 묻은 재봉틀을 한 번 돌려볼까? 하고 올려다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 건강을 잘 지켜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주저앉아 다시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너무나 절박하고 웃픈(?) 정황들을 보게 되었다. 마스크를 대신하여 양재기로 입과 코를 가린 그림, 자몽 비슷한 과일 껍질을 대용한 사진도 있었다. 넓적한 배춧잎에 눈과 입 부분을 사각으로 오려내어 쓰기도 했고, 어느 나라에서는 심지어 여성의 브래지어 캡 한쪽을 떼 내어 입과 코를 막았다. 영국의 지하철 안에서는 쇼핑 봉투나 플라스틱 상자를 뒤집어쓰기도 했고 어떤 이는 행주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 그 위에 고글을 썼다. 방독면 너머로 SNS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코로나 룩이라고 하여 목이 긴 티셔츠를 머리 위까지 끌어올려 얼굴을 몽땅 가리기도 했고 후드가 달린 티셔츠로 얼굴 전체를 뒤집어쓴 사진도 보았다. 위기에 대처하는 지혜라고 하기에는 씁쓸하였다. 하긴 고대 로마 시대에는 납이나 석면의 흡입을 막기 위해 동물 방광으로도 마스크를 만들어 썼다고 하니 그리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것보다 더 알 수 없었던 것은 4월 4일쯤의 뉴스에서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는 자국민들에게 스카프 같은 것으로라도 입과 코를 막으라고 권고하지만 자기는 쓰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아주 볼품없어 보이는 천 마스크를 쓰고 방송에 출연해 한 집에 두 장씩 공급하겠다고 하였다. 그것에 대한 국민의 심중이 미디어를 통해 아이러니하게 표출되었다. 두 개의 마스크로 눈과 입, 코를 가려버린 아베의 사진, 앞사람만 입을 가리고 뒤 2명, 3명은 끈만 지나가게 묶인 그림, 엄마와 아빠만 나눠 쓰고 아이는 부모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는 웃지 못할 패러디 사진들이 인터넷에 속속 등장하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강대국의 마스크 쟁탈전이었다. 이탈리아로 가야 할 것을 프랑스가 웃돈을 주고 중국 공항에서 가로채 갔다느니, 미국은 3M 사에서 생산되는 마스크를 해외에 수출하지 말라느니 등 치열한 마스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남의 일처럼 관조했던 서양에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퍼지자 발등에 불 떨어진 것처럼 마스크를 대하는 인식과 자세들이 바뀌어 가고 있다.
정부는 공급이 원활해진 마스크 5부제를 종료하면서 또 다른 우려를 발표했다. 아직 백신이나 치료제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을이 오면 인플루엔자나 코로나19 감염병이 2차로 확산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방역수칙을 잘 지키면서 장기전에 대비하자고 예고하였다. 그렇다고 일반 가정에서 별다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지난 봄날에 우왕좌왕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최전방을 사수할 마스크를 다시 한번 점검한다. 요즘에는 얼굴에 입는 옷으로까지 말할 정도로 위상이 새로워지고 있는 마스크, 몇 달간의 코로나19 상황을 지켜보면서 불안한 편안함보다 불편한 안전함을 위해 꼭 필요한 물건으로 재인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