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25 추념식 70주년 행사장에서 애국가 편곡과 연주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도입부 10초 정도가 북한 애국가와 비슷해 내 귀를 의심했다.”라며 북한 외교관 출신 태영호 의원이 불을 지폈다. 요즘 유행하는 트로트 가수 영탁이 “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고 노래한 것처럼 “북한 애국가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식이었다. 이에 편승하여 많은 미디어는 6·25 추념식 애국가 도입부 편곡이 북한 애국가와 유사했다는 제하의 보도를 하였다. 정부와 주관부처를 질타하는 비난성 여론까지 빗발쳤다. 일부 보수 유튜버들은 “북한 애국가 앞 소절을 따서 우리 애국가로 그대로 연주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며 곧바로 색깔론으로까지 전이시켜 불타올랐다.
국가보훈처는 반박 해명했다. “이번 6·25 행사가 70주년과 국군 전사자 유해봉환이 함께 거행된다는 점을 고려했다. 애국가가 특별히 엄숙하고 장중한 분위기로 연주될 필요가 있다고 논의되어 KBS교향악단에 편곡을 요청했다.”라고 했고, 그에 따라 KBS교향악단은 “장엄한 울림이 잘 전달되면서도 대중에게 친근감을 주는 곡으로 애국가 전주를 연주했다”라고 밝혔다. 직접 편곡한 김바로는 북한 애국가를 연주한 게 아니라 “팡파르라는 결과물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패턴이라서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한 애국가 연구가는 “이런 스타일의 편곡은 처음 접하는데 국가 의전에 적합하지 않다.”라는 의견을 냈는가 하면, 음악계의 중론은 논란으로 확산할 부분까지는 아니라고 일축하였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전 점검이 미흡했다. 청와대는 행사 주관자를 해임하라는 등의 여론이 무성하였다. 어떤 1인 미디어 방송인은 6월 16일 개성에 있는 남북 공동 연락사무소 청사 폭파에 대한 감정까지 더하여 북한을 “찢어 죽이고 싶다.”라고 하면서 “왜 그냥 있는 그대로 연주하지 편곡했느냐?”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있는 그대로의 애국가, 신성불가침이라도 되어야 하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엄숙하고 존엄하며 자칫 손대면 부정이라도 타는 것처럼. 그럴 것 같지만 사실 애국가는 조금씩 변해왔다. 7, 80년대까지만 해도 A 장조였다가 요즈음 G장조를 주로 사용한다. 원곡 격인 안익태의 교향적 환상곡 <한국>의 합창 부분은 내림 나장조이다. 그 1인 방송인의 주장대로 “있는 그대로 연주”해야 한다면 내림 나장조로 해야 맞을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이 노래하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음역이다. 조성뿐 아니라 빠르기도 변화했다. 원래는 느리게, 매우 장엄하게(Andante molto maestoso)였다가 요즈음은 보통 사람이 걸어가는 정도의 보통 빠르기로(moderato)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주도 늘 풀 오케스트라는 아니었다. 국가적인 행사나 학교, 또는 일반 기관의 의식에서는 풀 오케스트라 음원을 주로 사용했지만, 운동경기장이나 분위기 밝은 행사장의 취지에 따라서는 편곡이 달라지기도 했다. 이것은 다양한 음악의 요구와 시대의 흐름에 순응한 점도 있겠다. 이번 행사에서도 70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는 영웅들을 혼령이나마 정중하게 맞이하려 기획했던 것이 예기치 않은 여론에까지 휩싸였던 것 같다.
좀 더 들여다보면 애국가의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북한의 음악을 따라 했다고 마냥 흥분할 일도 아니다. 애국가에 대해 숙고해 보아야 할 본질은 따로 있다. 현재 우리의 애국가는 작곡가 안익태가 만들었다. 그는 193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애국가 노랫말을 스코틀랜드 민요 <그리운 옛날>(Auld Lang Syne) 가락에 얹어 부르는 것을 알았다. 일국의 애국가를 다른 나라 민요 가락에 붙여 부르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애국가를 작곡하겠다고 결심했고, 1936년 6월, 독일 베를린에서 애국가를 완성했다. 완성된 애국가는 그의 교향적 환상곡 <한국> 후반부에 삽입하여 그것을 주제로 삼아 교향적 환상곡 <한국>을 완성하였다. 이를 두고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애국가는 독립된 애국가가 없다.' 또는 '애국가는 안익태의 교향적 환상곡 <한국>에 삽입된 곡을 떼어서 부른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우리는 안익태가 우국과 충정의 작곡가라 배웠다. 그리고 가르쳤다. 그의 교향적 환상곡 <한국>을 핀란드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와 견주기도 하였다. 교향시 <나의 조국>을 작곡한 스메타나와 같은 훌륭한 작곡가라고 여겼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빼어난 작곡가가 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그것은 안익태의 두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어그러졌다.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각의 주장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안익태는 1942년 9월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에서 ‘만주국 환상곡’을 지휘했다. 1938년 ‘에텐라쿠(Etenlaku·월천악)’라는 일왕 찬양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 두 사례를 주된 근거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안익태를 친일 명단에 올렸다. 물론 안익태 기념사업회에서는 부인했지만, 애국가 곡조가 일제의 침략전쟁을 예찬한 ‘만주국 환상곡’과 비슷해 문제라는 주장 또한 우리를 갈등하게 했다. 이것들은 6.25 추념식의 도입부 편곡을 문제 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애국가는 노랫말 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글이다. 아니다. 친일 민족 반역자 윤치호가 썼다는 설이 오랫동안 맞섰다. 결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애국가 노랫말은 작자 미상으로 결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교수는 노랫말이 일본식이며 “애국가 가사는 일본을 찬미하는 내용이다”라고 주장한다. ‘애국가’ 2절의 ‘남산’이 서울 목멱산(남산)이 아니라 일본 교토(京都) 고야(高野) 산이라는 것이다. 일본에는 남산으로 불리는 산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 소나무로 유명한 남산이 고야산이라고 한다. 그는 “소나무는 한국이 아닌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다. 그들은 소나무를 국수(國樹)로 여기고 일왕이나 귀족의 저택, 주요 사적지 등에 널리 심었다.”라고 밝혔고 한국에서는 ‘매난국죽(梅蘭菊竹)’ 4 군자를 높이 쳤다.라고 했다. 또 ‘철갑을 두른 듯’의 철갑도 일본 무사 사무라이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한국 전통 갑옷은 종이나 직물에 가죽을 덧대 만들었다. 반면 사무라이는 철로 만든 갑옷을 입었다.”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라는 부분,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의 ‘공활(空豁, 텅 비고 너르다)’ 또한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일본식 상용한자라고 한다. 후렴구에 등장하는 ‘삼천리’라는 단어도 “조선의 통치권이 미치던 영역 ‘사천리’를 일제가 의도적으로 천 리를 줄여 만든 것으로,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은 표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교롭게 문제가 되었던 6.25 추념식 70주년 애국가 논란을 접하면서 이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갈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본다. 애국가는 나라를 사랑하는 중요한 상징이기는 하지만 신성불가침은 아니다. 애국가가 만들어졌던 시대적 아픔과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면 미래의 힘찬 대한민국을 향한 당당하고 떳떳한 애국가를 새로 꿈꿀 수는 없을까? 정쟁과 이념, 반목과 질시의 저급함을 벗어던지고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지향하며 꼿꼿한 자존감으로 세계를 향해 당당히 부를 애국가를 바라볼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