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줄임말을 많이 쓰지 않니? 거위벌레 공주는 너무 길어. 듣기에도 안 좋고. 거위 공주가 옳아.”
얼마 전 봄날이었어요. 도토리나무 숲은 잎사귀와 꽃이 모두 연둣빛으로 반짝였어요. 산벚나무는 연분홍 미소를 띠었고요. 아그배나무는 하얀 웃음으로 봄날을 반겼어요. 연두와 분홍과 하얀 꽃등을 숲 속 가득 주렁주렁 달아놓은 것 같았지 뭐예요.
그 무렵 거위벌레 어미도 땅속 나라에서 뛰쳐나왔어요. 화사한 봄 동산엔 거무칙칙한 색깔의 벌레까지도 어울렸다니까요. 거위벌레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가 초록 숲 요정에게 딱 걸렸어요. 요정의 얼굴이 찌푸려졌는가 했는데 바로 환해졌어요.
‘숲의 평화를 위해서 나타나지 않아야 할 빌런이 나타났군. 하긴 또 다른 인물이 더 걱정이지만.’
초록 숲 요정이 말한 또 다른 인물은 숲 아래 사는 세상 사람이었어요. 온갖 매연과 쓰레기로 자연을 망가뜨리는 사람들 말이죠. 계속 공기를 오염시키고 지구 온도가 높아지면 숲도 사람도 재앙에 빠질 수 있는데 말이에요. 더운 날씨를 좋아하는 거위벌레는 온 숲을 자기들 세상으로 점령할지도 모르겠어요. 요정은 지금 당장 벌레를 모조리 잡아 죽일까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전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 지구 온도를 높이는 일들을 멈춰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어요. 그래서 거위벌레를 좀 더 두고 보기로 했어요.
“거위벌레야 내가 암컷 벌레 씨를 줄게. 도토리나무에 올라가 네 아기를 낳아 키우렴.”
“도토리나무에 올라가서 제 아기를요?”
“왜? 튤립꽃밭이라도 바라는 거니? 여기는 도토리나무 숲이라는 걸 명심해.”
요정과 거위벌레가 꿍꿍이속을 주고받은 이 숲에는 도토리나무 친척이 모여 살았어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갈참나무가 아름드리로 꽉 차 있었어요.
초록 숲 요정의 바람대로 거위벌레는 이 숲에서 아주 잘생긴 상수리나무 위로 슬금슬금 기어올랐어요. 달과 별을 바라볼 수 있고 바람도 잘 통하는 꼭대기까지 올라갔어요. 상수리 열매 하나를 정하고 작업을 시작했죠, 드릴보다 뾰족한 주둥이로 구멍을 뚫었어요.
도토리나무 숲은 자지러질 듯 난리가 났어요. 상수리나무는 소리쳤어요. 멋쟁이 갈참나무도 외쳤죠. 잎 넓은 떡갈나무와 신갈나무, 굴참나무와 졸참나무까지 한 목소리로 대들었어요.
“이봐, 이 나쁜 벌레 같으니라고.”
“내 이름은 거위벌레야. 이름을 부르라고.”
“거위 건 가위 건 알 바 아니고 내 아까운 자식의 살점을 도려내는 것을 멈춰라.”
“그럴 수는 없지. 태어날 내 딸에게 멋진 방과 침대를 선물해야 하거든?”
“자기 자식에게 선물하려고 남의 자식 살갗을 파헤치는 거냐?”
“난 엄마잖아? 내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너는 자식도 많으니까 양보해 줘.”
“양보라니. 나도 부모야. 자식이 많아도 내겐 하나같이 소중한 보물이란 말이야.”
거위벌레는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뾰족하고 날카로운 주둥이로 아기 도토리의 살점을 후벼 팠어요. 상수리나무 도토리는 무섭고 아파서 잠도 잘 수 없었어요. 울다 소리치다 지쳐 목이 쉬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기 도토리의 살점이 파진 곳에서 거위 공주가 탄생했어요. 공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가 상수리의 행복을 깨물어 먹고 산다는 것이 괴로웠어요. 그래서 이곳을 떠나고 싶었어요. 엄지공주의 두꺼비라도 나타나면 그에게 업혀서 어디론가 가려했어요. 어떤 날은 엉엉 울어도 보았어요. 물고기의 도움을 청해보려는 신호였죠. 아니면 변덕쟁이 풍뎅이라도 날아오기를 기다렸어요.
호두 껍데기 침대보다 훨씬 훌륭했지만, 도토리에 미안하고 죄를 짓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맘속으로 빌었어요. ‘상처 입은 제비라도 나타나 주렴.’ 제비를 도와주고 꽃의 나라가 아니어도 좋으니 어디든지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한편으로 거위 공주는 이곳이 맘에 들었어요. 도토리나무 숲에 밤이 되면 예쁜 별들이 하늘 가득히 반짝였거든요.
“별님,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정말 행복했어요. 달님도 해님도 시원한 바람도 다 좋았어요.”
별님이 눈을 깜빡이며 들어주었어요. 거위 공주는 도토리의 살점을 뜯어먹고 그곳에서 잠도 자야 하는 괴로움까지도 말했어요. 별나라를 지나가던 달님이 대답했어요.
“거위 공주야 네 탓이 아니야. 너도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잖니?”
듣고 있던 상수리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날마다 상처 속에서 아프게 살았지만, 그도 어엿하게 자라 있었어요.
“거위 공주야 너도 아프니? 나도 아프다.”
“듣고 있었니? 상수리야 정말, 정말 미안해.”
“네 엄마는 원망도 하고 미워했지만 너는 맘이 착하구나. 미안하다니 됐어.”
도토리나무 숲에 여름이 왔어요. 햇빛은 염소의 뿔도 녹일 거처럼 이글거렸지요. 매미들의 노랫소리가 계곡 가득 물결쳤어요. 그 소리에 거위벌레 어미의 마음이 바빠졌어요.
“거위 공주야, 이제 너는 땅속 나라로 갈 때가 되었구나.”
거위벌레 어미는 공주가 들어 있는 상수리 열매와 그 주위 이파리가 붙어 있는 채로 가지를 잘랐어요. 가위로 싹둑 자른 것 같은 작은 가지는 나뭇잎 비행기가 되었어요. 푸른 숲 속을 사뿐히 내려앉아 공주를 안전하게 모셨어요. 거위 공주의 집이기도 했고 먹잇감이 되었던 상수리는 슬프기도 했지만 미안해하는 공주를 향해 말했어요.
“거위 공주야 네가 땅속 나라로 들어갈 때까지 내가 지켜줄게.”
“그럼 네가 꽃의 나라 왕자 대신이야?”
“하하, 그건 아니고 너를 위해 친구가 되어줄게.”
“친구? 내가 너를 그렇게 괴롭혔는데 친구 해도 될까?”
“그럼. 땅속에는 나쁜 두더지와 그 엄마도 있을 수 있으니까 조심하고. 꼭 행복하길 빌어 줄게.”
숲 바닥에는 도토리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 비행기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어요. 산책하러 온 사람은 깜짝 놀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한 마디씩 던졌어요.
“끔찍하네. 어떤 놈이 싱싱한 도토리나무 가지를 저렇게나 많이 잘라놓았지?”
지켜보던 초록 숲 요정은 한숨을 쉬었어요. 어깨를 으쓱 추켜올리다가 갈증이 났는지 숲 속 옹달샘 가로 가버렸어요.
매미 소리가 절정인 도토리나무 숲을 산책하였습니다. 능선 길을 따라 도토리나무 잔가지가 무수히 떨어져 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상수리가 가장 많았고 다른 도토리 가지도 푸른 열매를 단 채 널려 있었어요. 알고 보니 도토리 속에는 거위벌레가 자라고 있답니다. 그 말을 듣고 튤립 꽃 속에서 태어난 엄지공주가 생각났어요.
비록 거위벌레는 엄지공주보다 더 작고 못생긴 미물이었지만 그 어미에게는 소중하고 예쁜 공주도 될 수 있겠다 싶어 패러디해 보았습니다.
원작에서 엄지공주는 작고 나약합니다. 여기저기 어려움에 부딪히면서 멋진 왕자를 만나 혼인하게 됩니다. 거위 공주는 남에게 폐 끼치는 걸 미안해하고 땅속 나라에서는 당당하게 살아갈 것을 희망해 보았습니다.
다만 초록 숲 요정의 바람대로 벌레보다는 사람들이 각성하고 지구를 살리는 데 앞장섰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썼습니다.
거위벌레는 도토리 살갗을 파고 새끼를 키웁니다. 땅으로 안전하게 내려보내기 위해 이파리가 달린 나뭇가지를 절단하는 앙큼하고 영리한 빌런입니다. 그 자체가 빌런 일 수 있어서 두꺼비나 풍뎅이, 두더지보다 해와 달과 별님을 초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