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도피처가 되지 않는 인생
제시간에 출발했다면 도착시간은 한국시간으로 저녁 10시쯤 되었을 텐데 지연된 탓에 다음날 오전 8시에 도착했다. 시간 맞춰 아버지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주셨다. 집이 송도라 공항과 가까운 탓에 마중 나가는 부담이 적어 조금은 편하게 부탁드릴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해 짐을 풀고 부모님께 드릴 몇 가지 선물과 기념품을 보여드린 후 오랜만에 집밥을 먹었다. 집밥을 먹으니 비로소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궁금해하실 부모님을 위해 어디를 갔다 왔고 어디가 좋았으며 미국이란 나라는 이렇더라고 짧게나마 소감을 이야기드렸다. 이젠 여자랑 가야지 왜 혼자 가냐는 핀잔을 듣기는 했지만 내가 여행 일주일 전 가겠다고 통보하고 설연휴를 뭉텅 도려내 획 다녀온 것 치고는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뭐라 하시더니. 설연휴를 가족과 함께하지 않고 고스란히 개인 여행으로 보낸 것도 처음이었다. 부모님은 딱히 명절이라고 어디를 가시진 않으셨다. 할머니, 외할머니 모두 돌아가신 뒤로는 친척과 만나는 일도 드물다. 다음날은 평일이고 출근일이다. 내가 여행을 가있는 동안 내 세상은 그대로였다.
목적이 있어 떠난 건 아니었다. 왜 갔냐고 물어보면 그냥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왜 뉴욕이냐고 물어보면 그러게라고 어물쩍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그 당시 나에게 여행이라는 선택지가 떠올랐고, 뉴욕이라는 도시가 눈에 들어왔으며 아주 순간의 용기로 비행기표를 끊은 것, 그게 전부였다. 저지르고 수습한다는 말이 딱 맞을 것이다.
여행은 경험일까. 여행은 소비일 뿐이라는 어른들의 말도 있지만 100% 동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이번 여행은 도전이었고 또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소심하고 낯가리는 내가 낯선 곳에 나를 내던져보는 도전이었고 이럴 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바라보고 확인하는 경험이었다. 물론 며칠 되지도 않고 단지 여행일 뿐인데 도전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맞나 싶지만 아무렴 어때, 난 지금까지 꽤나 온실 속에서 살았는 걸. 그걸 내 손으로 조금씩 깨부수는 과정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쨌든 나에게 여행보다 중요한 건 일상이다. 일상이 단단해야 여행도 행복한 것. 여행이 도피처가 되는 인생은 얼마나 불행한가. 몇 개월 뒤에 떠나는 여행만을 바라보고 그 시간을 견디는 삶은 얼마나 지루한가. 그냥 내 일상이 여행처럼 신나고 재밌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나저나 회사에서 주는 2주 근속휴가를 3월 말까지 써야 되는데 또 해외를 가야 할까...?
(사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이미 3월은 당연히 지났고 나는 또 해외여행을 떠났다.)
참고) 나는 왜 이 여행기의 제목을 '뉴욕, 여기까지 잘 왔어요.'라고 지었냐. 뉴욕에 혼자 여행올 정도로 잘 살아왔구나,라는 첫날의 벅참을 제목으로 표현한 것이다. 너무 좀 오버스러웠나? 그런데 이게 내 진짜 마음이다.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지만 이런 거 하나에 대단하다 느낄 줄이야, 나는 참 별거 아닌 인생을 살아왔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