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날씨가 약간 흐려져 있었다. 비가 온 흔적도 보였고, 들어갈 때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시간은 오후 3시. 센강을 옆으로 끼고 서쪽으로 쭉 걸으니 저 멀리 앵발리드가 보였다. 앵발리드의 황금색 돔을 보면 파리 올림픽 양궁이 생각난다. 앵발리드를 배경으로 활을 쏘던 선수들의 화면이 정말 멋있었던 기억이 있다. 프랑스의 군사학교에서 벌어지는 양궁 게임. 상상만으로도 멋있다.
앵발리드를 지나치니 살짝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비는 아니고 햇빛이 비추며 내리는 여우비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않았는데 우산을 안 쓰기에는 사실 비가 꽤나 내렸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약간 뛰었는데 현지인들은 그냥 자기 보폭 그대로 걷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은 왜 우산을 안 쓸까? 흙비가 아니어서 그런가?
앵발리드를 거쳐 쭉 남쪽으로 내려가니 프랑스 현지인들이 사는 골목이 나타났다. 끌레흐가였는데, 사람들이 비 오는 와중에 어떤 건물 입구에 모여있었다. 사람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모여있어 반대편 인도로 넘어가야 했는데 간판을 봤더니 학교인 것 같았다. 자녀의 하교를 기다리는 학부모의 모습인가? 궁금해서 조금 기다려봤지만 뭔가 문을 열고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대로 지나쳤다. 그리고 그대로 지나치니 나오는 또 다른 학교. 우리나라의 초등학교로 보이는 곳이었는데 간판을 쳐보니 Ecole Maternelle, 우리나라로 치면 유치원이었다. 하교시간인 듯 아이들이 어머니 손에 쫄래쫄래 나오고 있었고 문 너머로 보이는 안쪽에는 선생님과 학부모인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문 앞에는 어머니와 두 남매로 보이는 자녀가 귤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프랑스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이 장면이었다. 세상 사는 것, 다 똑같다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기억인지, 이 장면에서 느끼는 따뜻함이 여행 거의 1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난다. 프랑스 파리 한복판에서 유치원을 보낼 정도면 어느 정도 사는 집안일 거야,라는 다소 자본주의적인 접근도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누군가의 삶의 터전과 그 삶의 과정을 조금이라도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그게 여행의 필요함이 아닐까.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금 더 걸으니 보이는 에펠탑과 마르스 광장. 마르스 광장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으므로 나는 이에나 다리로 곧장 가서 에펠탑을 보기로 했다. 오던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이 드러나니 이에나 다리에서 보이는 에펠탑이 정말 높고 웅장해 보였다. 각자 에펠탑을 감상하며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한편에서 숏폼을 찍고 있었다. 나는 사진 하나를 남기고 싶어 쭈뼜쭈뼜 다리를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보이는 파키스탄 느낌의 남성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옳다구나 하고 사진을 찍어주고 나도 찍어달라고 했는데, 정말 너무 못 찍었다. (나도 못 찍어줬을까?) 그래서 좀 젊은 여자분에게 부탁하고 싶었는데 저 멀리서 동양인 중년 부부가 사진을 찍으려고 손을 쭉 뻗고 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한국사람이었고, 제가 찍어드릴까요? 라며 먼저 다가가 사진을 찍어드리고 나도 찍어달라 해서 어머니가 찍어주셨다. 은퇴하고 여행을 다니는 중이셨고, 나는 혼자 왔다고 하니 엄청 대단하게 나를 보셨다.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 파리올림픽 폐회가 채 1년도 안지나 아직 오륜기 동상이 있었고 나는 그 오륜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더 찍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 안 사실인데, 한국말을 정말 잘하는 프랑스 직원이 있었다. 한국에서 준비한 라면을 먹고 싶었는데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이 안 나와 물어보려 갔더니 대뜸 한국말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서 한국말로 좀 더 이야기를 나눈 후 옆의 레스토랑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방으로 돌아왔다. 그 나라 언어를 쓰니 서양인이어도 한국인처럼 느껴지는 마법. 앞으로 이 분께 부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