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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중 Nov 05. 2020

알코올성 치매

자기기만의 함정

거짓말에도 '타짜'가 있다면 어떤 사람일까

쥐꼬리만 한 사실을 마치 전체인 양 부풀릴 수 있는 화려한 언변을 가진 사람. 상대방의 반응을 몇 수 앞에서 읽을 수 있는 심리의 귀재. 아님 정치인?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답변이겠지만, 자기 자신조차 속일 수 있는 사람이야 말로 으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스 박사에 따르면 '자기기만'이라고 일컫는 이런 뇌의 방식은 누군가를 속이고 이를 간파하기 위해 적응해온 뇌 진화의 산물이라 언급했다. 예를 들어 거짓말도 잘하려면 이로 인한 두려움과 부담을 떨쳐야 한다. 이때 우리 뇌는 '자기기만', 즉 스스로 거짓말을 합리화하여 실제 믿어버리는 적응 상태를 만들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확률을 높인다. 그러나 뇌의 이런 방식이 그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오늘 이야기할 알코올성 치매 환자들의 경우다.


가장이었던 그에게 한 가지 낙이 있다면 작은 선술집에 들려 꼬치 몇 개와 따뜻한 정종 몇 병 데워 마시는 것이었다. 퇴근 시간에 어스름한 골목에 있는 선술집에 들리면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편했다. 가족들도 그 정도의 혼자만의 시간은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막내를 대학에 입학시키고 나니 이제야 자신이 할 일을 마무리했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부모로서 여기까지 뒷바라지해 준 자신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러나 그의 삶이 송두리 째 무너진 건 비 오는 날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위해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왔던 딸을 차 사고로 잃은 이후였다.


'그 날 내가 그 선술집만 가지 않았더라면'

비극적 상황에서의 가정(if)은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냥 그렇게 되었을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에 자신을 가장 큰 원인으로 귀결시킨다. 자식을 구해내지 못한 부모로서 자신에게 휘두르는 채찍질이다. 그 날 이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기억을 마비시키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시작 됐던 간에 알코올 중독은 그 사람의 고통만 삭제시키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는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된다. 고통이 극심해지면 우리 뇌는 참 잔인하다. 지금까지 건강한 방식으로 내 감정을 다뤄왔던 마음의 도식들은 희미해지고 술이 내 모든 감정을 좌지우지한다. 10년의 긴 시간 동안 그는 점점 잠식되어 갔다.


가족들에 따르면 처음에는 그도 알코올 블랙아웃 현상부터 나타났다. 알코올 블랙아웃은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기는 현상이다. 마치 칼로 도려낸 듯 깨끗이 그 전날의 기억이 사라진다. 이는 흡수된 알코올이 혈액을 통해 우리 기억을 관장하는 뇌의 해마(hippocampus)라는 부위에 올라가 글루타메이트를 만드는 신경세포끼리의 신호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 어떤 사람들은 문제를 인식하고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 부응하여 또는 음주 운전 같은 위험한 행동을 했음에도 이를 기억 못 하는 자신을 보고 놀라 술을 끊기로 결심한다. 알코올 블랙아웃 치료에 도움이 되는 티아민을 복용하고 술을 끊기 위해 항 갈망제 치료와 상담을 받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중독된 뇌는 그에게 언제든지 술만 끊으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착각을 그에게 각인시켰다. 기억의 상실이 마치 불안과 고통을 잊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를 놓치게 되면 뇌의 자기기만은 더욱 강력해진다. 이제는 감정을 마비시키는 것을 넘어 단지 중독 회로를 확실하게 만족시켜 줄 만큼의 술이 목적이 된다.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정보를 걸러내는 기능이 술로 인해 마비되면 우리 뇌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중독된 뇌의 욕구에 따른 '자기기만'이 더욱 강화되면 술에 취했을 때의 모습을 진정한 자기로 생각하고 내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술로 대체된다.


기억과 관련해서는 더욱 심각한 현상이 벌어진다. 알코올성 치매의 대표적인 증상 중 작화증 (confabulation)이라는 현상이 있다. 허언증 환자처럼 알코올로 인해 사라진 기억의 빈자리를 근거 없는 이야기로 채워 넣고 이를 사실이라 믿는다. 분명 술로 인해 기억을 못 할 뿐 현실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없는 이야기를 마치 방금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이어간다. 내가 만난 한 환자는 진료실에 방문하기 전날 밤 무엇을 했는지 또렷이 기억했다. 잠들기 전까지 누구와 통화를 하고 무슨 TV 프로그램을 보고 어떤 야식을 시켜먹었는지 상세히 설명했는데 가족들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 환자는 인사 불성이 되어 밤새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고 온 상황이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전두엽이 망가진다. 그들은 야윈 얼굴에 술에 취해 무슨 말인지도 모를 고함을 친다. 그리고 깨고 나면 그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잘 걷지도 못한다. 일반 치매 환자들보다 알코올성 치매 환자는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임에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만큼 술로 인해 급격히 기능이 떨어지기도 한다. 처음에 가족들은 술에 취했을 때는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말로 그들을 대변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변명해주는 역할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어두운 마음 한편에 그 사람이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을 수십 번 되네인다. 그들은 술에서 깨도 만취되어했던 행동에 대한 미안함보다 지쳐버린 몸과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 없는 분노를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쏟아낼 뿐이다.


더욱 안타까운 건 어느 순간 가족들도 그의 고통보다 술로 인해 자신과 가족을 포기한 그에게 분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당신의 자식이고 우리도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다.' 하지만 더 이상 술에 지배당한 그에게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이제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의 손은 떨려오고 이유 없는 초조감에 밤을 지새운다. 갑자기 죽을 듯이 식은땀을 흘려대며 취하지 않았는데도 뭔가가 보인다고 하거나 헛소리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돌이켜보면 알코올성 치매 환자는 카프카의 '변신'에 나온 그레고리를 떠올리게 한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보면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벌레로 변한 충격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은 그레고리는 자신보다 지금까지 돌봐온 나약한 부모와 여동생을 걱정한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이미 사람의 목소리를 잃어버렸기에 가족들에게는 단지 벌레가 내는 무의미한 소리일 뿐이다. 자신이 좋아하던 그림에 매달려 있는 것조차 더러운 벌레의 지저분한 움직임이 된다. 사과에 맞아 죽는 그 순간까지도 가족들은 벌레 안에 남아 있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나 또한 자식을 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그에게 변화의 동기를 마련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래도 알코올성 치매는 의학적으로 치매의 15%를 차지하는 치료 가능한 치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중독된 그의 뇌는 강력한 자기기만 상태에 빠져 그를 놔주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 대한 기억, 감정, 주위 사람들은 모두 술과 연결됐을 때만 의미를 가졌다. 처음에 그가 가졌던 고통스러운 죄책감은 어느새 자신에게 조차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수치감으로 남았다. 알코올 중독이 가져오는 수치감은 자신이 해를 줬던 사람과 대면하고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해야만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데 지금 그에게는 용서를 구할 대상이 사라졌다. 그리고 또 다른 희생자로서 고통받고 있는 가족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6개월 간의 입원 치료 과정을 통해 환자는 폭음으로 처음에 걷지도 만큼 망가진 몸 상태가 회복되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나타나는 금단 증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벌써 상당히 진행해 버린 치매 증상은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이는 마치 암이 전이되기 전과 후의 치료 예후가 확연히 차이 나는 것과 유사하다. 치료진에게도 비극적 상황에서의 가정(if)은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진행되는 일반적인 치매와 달리 알코올성 치매는 분명 개입할 수 있는 시점이 있다.


그가 아직 고통에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술에 빠지기 시작할 무렵, 알코올 블랙아웃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이 두 번의 시기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하는 비극적 가정이 마음속에 맴돈다. 뇌의 자기기만이 강력하게 작동되고 나면 그레고리의 벌레 소리처럼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이제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그는 진료실에 가족과 들어와 빙긋이 미소만 짓고 있고 대답하지 않는다. 가족들이 대신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준다. 그래도 나는 확인차 가족들에게 물어본다.

'요새 술은 안드시죠?'

'네 요새는 술을 마시지 않아요.'

그러나 가족들의 다음 말이 나에게 아프게 다가온다.

'이제는 술을 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 같아요.'

중독된 뇌는 자기 기만을 통해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로부터 얻었는가. 그도 더 이상 괴롭지 않고 평안을 찾은 것인가. 스스로 고통을 직면하고 자신을 용서할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비록 그의 표정은 미소를 짓고 있을지언정 나는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는 단순히 그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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