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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중 Nov 17. 2020

체취

고독이 남긴 가장 비극적 체취에 대한 기억

'내가 요새 스트레스가 심해요. 글쎄 내가 세준 집 할아버지가 고독사로 죽은 거야. 그 상태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냄새가 빠지질 않아. 특수 청소도 맡겼는데 그래도 시간이 오래 걸려서 두 달은 아무것도 못해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먹먹했다. 물론 집주인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에 남겨진 나의 체취로 인해 누군가 불쾌해한다면 내 삶 전부가 부인당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학생 때 국과수에서 진행되는 부검을 하루 참관하는 실습 과정이 있었다. 시신을 보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해부학 실습 때는 시험 전 날 밤늦게 해부한 시신 옆에 앉아 이게 무슨 신경인지, 혈관인지 외우는데만 집중했다. 아마 당시에는 포름알데히드에 의해 방부 처리된 시신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거부감이 덜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국과수에 방문한 날 부검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맡았던 냄새는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부검실에는 철제 침대 세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고 입구 쪽 방향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흰색선이 그어 있었다. 학생들은 그 선 밖에서 부검의들이 부검을 시행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세 구의 시신이 놓여 있었는데 사실 거리가 있어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냄새는 더욱 강렬해졌다. 마음의 울렁거림이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한 부검의가 학생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세 구의 시신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간략히 설명했다.

'이 시신은 산에서 등산객이 우연히 발견했고 일부 백골화 상태로 여기 왔습니다. 사고 일지 자살 일지 살펴봐야겠지만...'


그러나 내 귀에는 설명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에 눕혀진 시신 때문이었다. 검고 야윈 다리가 한쪽은 철제 침대에 붙어 있고 다른 한쪽은 반쯤 굽혀져 있다. 내 기억에 멀리서 볼 때 형체가 그나마 온전한 것은 다리뿐이었다. 아마 부검실을 가득 채웠던 냄새는 여기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부검의는 마지막 시신 옆에 서서 말을 이었다.

'이 시신은 고독사로 왔습니다. 상태를 보면 오랜 시간 방치됐던 것 같네요.'




나에게 고독사의 체취가 왜 이렇게 지독하게 느껴졌을까? 단순히 시신 냄새라 기억했을까. 후각은 다른 감각과 비교했을 때도 가장 복잡한 감각이다.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시각, 청각, 촉각은 구현해 냈으나 후각은 아직까지 구현하지 못했다고 한다. 단순히 코에 있는 후각 수용체가 냄새 분자와 결합하여 냄새를 뇌에서 인식하는 단순한 과정이라 생각했지만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후각 수용체는 코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400종 이상의 후각수용체가 우리 몸 여기저기 흝어져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정자조차 후각 수용체를 갖고 난자를 찾아간다. 체취는 단순한 감각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프루스트 효과는 프랑스 작가 마스 셀 프루스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냄새로 이런 시절을 회상하는데서 유래했다. 특정한 냄새가 강렬한 기억과 연결되는 현상이다. 사람의 오감 중 후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시각, 청각, 촉각, 미각)들은 순차적으로 시상(thalamus)이라는 안쪽 뇌 부위를 거쳐 감각정보가 조절되고 통합된 다음 대뇌에 도달한다. 그러나 후각만큼은 이런 중간 과정이 없다. 바로 뇌에 전달된다고 한다. 이로 인해 후각은 강렬한 감정, 기억과 연결되어 우리 뇌에 각인된다.


체취라는 것을 단순히 몸에서 나는 냄새로만 본다면 이는 불쾌한 분자 화학반응일 뿐이다. 단순히 체취만 이야기하자면 특히 노인의 냄새는 더 유쾌하지 않다. 노네날(nonenal)이라는 성분이 모공을 막아 박테리아를 증식시켜 나는 냄새이니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체취는 후각 반응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체취라는 것은 감각 이외 여러 가지가 혼합된 복합적인 반응이다. 앞에서 프루스트 효과에서 이야기했듯이 후각은 그 사람의 강렬한 감정 그리고 기억과 연결된다. 그렇기에 자식이 부모에게 느끼는 체취와 손주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느끼는 체취는 다르다. 왜냐하면 동일인일지라도 자식과 손주가 갖고 있는 경험과 기억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원래 체취는 의사소통을 위해 발달했다. 동물들은 오랫동안 강하게 남길 수 있는 냄새로 서열과 자기 영역을 정하고 가족과 적을 구분했다. 그들의 체취는 동료에게는 안전, 적에게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또한  페로몬과 같은 체취는 동물의 짝짓기에도 짝을 고르는 중요한 소통 수단이다. 체취는 인간의 언어처럼 섬세하지는 않지만 소통의 목적으로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언어가 발달했기에 입술 모양이나 표정을 읽기 위한 시각과 상대방의 언어를 듣기 위한 청각 등의 기능이 더 발달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원시 감각에서 중요한 소통 역할을 했을 체취는 여전히 더 깊은 영역에서 잠재하며 두 사람 사이의 연결에 관여하고 있을 것이다.     


아기에게 엄마의 체취는 냄새로만 경험되는 게 아니다. 눈도 못 뜬 아기에게 엄마의 젖 냄새와 체취는 감각과 소통의 복합적인 경험으로 '심리적 안정감(sense of security)'의 재료가 된다. 안정감의 근원인 엄마의 체취는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기억에 각인된다. 반대로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난다. 엄마는 아기로부터 정확히 묘사할 수 없지만 기분 좋은 아기 냄새를 맡으며 사랑을 키워간다. 여기서 아기에게 나는 체취는 '모성애'의 근원이 된다. 이렇듯 체취를 통한 소통은 인간다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체취가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놀라운 상상력으로 묘사했다. 주인공 그루누이는 체취 없이 태어났기에 남들은 그의 존재감을 전혀 느껴지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발달한 후각으로 다양한 향수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때에 따라 사용할 자신만의 체취를 인위적으로 만든다. 사람들 사이에 편안하게 있고 싶으면 '겸손의 향기'를 사용했고, 자신을 푸대접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약간 진한 땀냄새 향수로 '바쁜 사람이라는 체취'를 만들었다. 중년 여자에게는 '동정심' 유발하는 향수를 만들고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는 '역겨운 향수'로 그 사람이 자신을 피해 가도록 했다. 선천적으로 체취가 없어 존재감 없이 태어난 그루누이는 세상 모든 이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향수를 만들기 욕망하고 25명의 어린 소녀를 살해하기 시작한다. 그루누이에게 체취가 없다는 건 살인을 할 만큼 강렬한 욕망과 이에 비례한 결핍을 의미했다.




다시 앞에서 던진 질문을 던진다. 나에게 고독사의 체취가 왜 이렇게 지독하게 느껴졌을까?

단순히 시체 냄새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고독사의 체취는 냄새 이외 나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의 체취에는 오랜 기간 동안 누적된 고독과 외로움이 담겨 누구도 쉽게 다가가기 어려울 정도의 무거움이 있었다. 그 사람의 인간다움과 존재감을 느끼게 해줬던 체취가 역설적으로 죽음의 공포을 풍기기 시작했다.  삶의 마지막을 홀로 맞이하며 느꼈을 두려움과 이후 방치되어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겐 부담이 되어버린 존재, 즉 죽어서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조차 잃어버린 비극적 상황이다.


그 체취의 지독함은 고독과 외로움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말해줬고 나에게 고독사를 단순한 통계가 아닌 생생한 현실로 경험하게 해줬다. 그리고 아마 그 지독함 아래에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생기지 않길 바라는 그의 간절한 마지막 사념이 섞여 있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내가 아직까지도 그의 체취를 기억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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