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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중 Oct 31. 2019

나쁜 치매 증상으로서의 '망상'

치매와 살아가기 - 실전편 3

오전 진료 중 대기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카랑카랑한 할아버지 목소리와 이를 달래려는 직원들 목소리가 어수선하게 들려왔다. 70대 할아버지가 분에 못 이겨 지팡이를 휘둘렀던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나를 여기 데려와!'  
                                              
할아버지는 1년 전부터 아내를 의심하고 분노를 참지 못했다. 처음에는 아내가 어디 갔는지 확인하고 누구를 만났는지 물어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뜸 어떤 남자를 만나고 왔냐고 소리쳤고 최근에는 아내에게 나무 상자를 집어던져 이마에 7 바늘이나 꼬매는 상처를 냈다. 아내는 최대한 견디려 했지만 심해지는 폭언과 위협에 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딸들은 우울증이 심해져 아버지의 집착이 심해졌다고 생각했다. 딸들은 아버지에게 상담만이라도 받아보자 설득해 병원까지 데려왔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딸들과 같이 온 곳이 정신과라는 걸 알고 화를 참지 못했던 것이다.


 

노년기에 갑자기 나타난 망상이라고 모두 치매로 인한 것은 아니다. 조현병이나 망상장애, 알코올 문제로 인한 편집증, 뇌 손상에 의한 정신과적 문제를 감별해야 한다. 하지만 역으로 정신병으로만 간주하다가 치매를 놓치게 되면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나쁜 치매로서의 망상은 치료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나쁜 치매 증상을 불러온다. 또한 망상으로 인해 치매가 한단계 더 진행될 수 있고 이는 가족들의 경제적, 심리적 부담을 악화시킨다. 그렇기에 망상 증상은 치매의 여러 증상 중에서도 핵심 증상이다.


치매 망상의 종류


나쁜 치매 증상으로서의 망상에는 가족이나 지인이 자신의 물건을 훔쳐간다고 믿는 '도둑 망상', 배우자의 외도를 의심하는 '부정 망상',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낯선 사람으로 여기는 '착오 현상'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해코지 한다는 '피해망상' 등이 있다. 나타나는 빈도로 보면 '도둑 망상'이 가장 흔하다. '며느리가 쌀을 훔쳐간다. 딸이 내 통장에 돈을 빼가 시댁에 준다'와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룬다. 기억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누군가 훔쳐갔다고 믿는 게 치매 노인에게는 더 합리적인 설명이 된다. 자신을 잃어가는 치매의 가장 특징적인 증상을 고르라면 '착오 현상(misidentification)'을 선택할 것이다. 뇌기능 저하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증상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자신인 줄 모른다. 이로 인해 최근 치매 노인을 위한 주거 환경을 고려할 때 여기저기 거울을 설치하지 않도록 한다. 이 중에서 오늘은 치매 망상을 대표하는 '도둑 망상'이나 '착오 현상'이 아닌 '부정 망상'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역사상 '첫'번째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첫'증상은 '부정 망상'이었다.


알츠하이머 박사(1864~1917)는 인지저하와 이상행동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51세 여성 '아우구스트 데터 (Auguste Deter, D부인)'의 뇌를 부검했다. 뇌는 육안으로도 심하게 위축되어 있었고 뇌조직을 염색해 보니 이상한 덩어리(노인반, senile plaque)가 관찰됐다. 1906년 11월 3일 알츠하이머 박사는 이를 정리하여 학회에 발표했는데, 이것이 알츠하이머병의 최초 보고였다. 이 과정에서 D부인은 역사상 첫번째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되었다. 흥미로운 건 알츠하이머 박사의 기록을 통해 확인한 그녀의 초기 증상인데 바로 '부정 망상'이었다. 철도 직원이었던 남편과 딸을 낳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해오던 D부인은 남편을 간통죄로 고소하는 망상 증상을 시작으로 치매 증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녀는 사망하기까지 약 5년 간 정신병원에서 지내게 된다.


(왼쪽: 아우구스트 데터 부인, 오른쪽: 알츠하이머 박사)


'부정 망상'은 배우자의 외도를 의심하는 병이다. 망상과 걱정을 구별하는 기준은 배우자의 외도를 확신하게 된 '증거'의 차이에 있다. 망상 환자는 '바닥에 떨어진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털'하나도 외도의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인다. 추론을 통한 결론이 아닌 이미 정해진 결론을 갖고 있다. 이를 부인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내밀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처증, 의부증으로 잘 알려진 부정 망상은 원래 치매 노인보다 40대에 호발하는 대표적인 망상장애다. 특히 치료하기 어렵다. 이혼과 관련된 법적인 문제가 자주 엉킨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목적인 환자들에게 그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정신과 의사들은 의처증, 의부증을 주제로 면담할 때 긴장한다. 내가 쓰는 단어 하나부터 내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 표정까지 신중을 기한다. 그리고 사실 여부 확인보다 그로 인한 불안이 스스로를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할아버지는 상담만 받자는 딸의 설득에 결국 진료실에 들어왔다. 대화조차 거부하던 할아버지는 아내에 대한 배신감,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자녀들에 대한 분노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아내의 외출 횟수가 잦아지고 자신과의 부부관계를 피하는 것을 보니 외도가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딸의 이야기는 달랐다. 어머니의 외출이 잦아진 게 아니라 아버지의 활동이 확연히 줄어든 것이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는 집 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고 했다. 어머니는 남편과 같이 활동하고 싶었지만 이전과 달리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남편을 '우울증'이라 생각해 조심스럽게 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를 향한 할아버지의 눈초리는 점점 매서워졌다.  아내가 집에 돌아오면 핸드백을 몰래 뒤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앞쪽뇌 (전두엽) 기능이 저하되면서 무의욕(apathy) 증상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내와 딸은 이 모습을 우울증으로 해석했지만 이는 치매로 인한 증상이었다. 소이카 등이 영국 정신의학 저널(British journal of Psychiatry)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부정 망상은 우울증(0.1%) 보다 치매, 파킨슨병, 뇌졸중과 같은 뇌질환(7%)에 의해 더 높은 빈도로 동반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변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변한 건 할아버지였다. 가족들도 모르는 사이 나쁜 치매에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치매의 부정 망상은 일반적인 의처증, 의부증과 다르다.


그런데 치매 환자의 '부정 망상'은 일반적인 의처증, 의부증과 '무언가' 다르다. 초기 배우자의 외도를 이야기할 때 보이는 분노의 감정은 일반 의처증, 의부증 환자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일정 수준 이상 넘어가면 일반 의처증, 의부증처럼 끝없이 집요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집착의 내용 또한 다소 단순하다. 물론 치매 노인의 경우 뇌기능이 떨어졌기 때문으로 설명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임상정신의학저널(Journal of Clinical Psychiatry)에 하시모토 박사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부정 망상의 발현은 오히려 일정 수준 이상의 인지기능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예후가 좋지 않은 일반 의처증, 의부증과 달리 뇌기능이 떨어졌음에도 치매 환자의 부정 망상은 오히려 1년 내 83%에서 증상이 회복되었다.


할아버지는 결국 입원 치료를 시작했다. 입원 초기 가족에 대한 분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정 망상이 더 번지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매일 밤 소리치며 '딴 짓거리 편하게 하려고 자신을 여기 가둬뒀다'. '딸도 그놈에게 돈을 받아 지 엄마와 짜고 자신을 가뒀다'며 흥분했다. 당연히 가족들의 면회는 환자의 분노로 더 이상 진행되기 어려웠다. 그런데 4주 정도 지날 무렵 환자는 더 이상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마치 병동 생활에도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약물 치료와 심리적 개입이 환자의 분노를 가라앉히는데 일부분 도움을 줬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할아버지는 초조해하며 같은 방 사람들에게 아내의 외도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면담할 때도 물어보지 않으면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내의 외도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차이는 생물학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알츠하이머가 아닌 루이체 치매에서 나타난 부정 망상이거나 성적인 내용의 환시가 동반된 부정 망상은 일반 의처증, 의부증처럼 예후가 나쁘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들의 속마음에 초점을 맞춰보자. 개인적으로 치매의 부정 망상이 다소 단순하고, 폭발하던 감정이 어느 순간 무뎌지는 건 그들 스스로 마음 속에 '선'을 긋고 이를 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할아버지의 부정 망상 증상이 나아졌다 생각했지만 그건 적절한 판단이 아니었다. 증상의 양상이 달라졌다. 외도에 대한 초조감 아래 홀로 남을 것에 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었다. 홀로 남는 것에 대한 불안은 외도에 대한 집착도 키웠지만 역설적으로 할아버지의 분노를 감내하도록 한계를 지웠다. 망상의 내용이 머릿속에 사라지지 않더라도 이 두 가지 불안(홀로 남는 것에 대한 불안, 외도에 대한 불안)이 균형을 맞추고 있을 때, 할아버지는 분노를 마음의 그릇에 담아 둘 수 있는 것 (containing) 같았다.


퇴원 후 통원 치료 중 할아버지의 부정 망상이 다시 악화되었다. 재입원을 고민하던 가족들과 상의 후 우리는 한 가지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할아버지와 아내를 오히려 철저히 분리시켜 보기로 했다. 이는 다시 한번 할아버지 마음속에 '홀로 남는 것에 대한 불'안과 '외도에 대한 불안' 사이의 균형을 맞춰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물론 가족들이 초반 할아버지의 분노를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일주일 후 할아버지는 아내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며 차분히 같이 지내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외래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할아버지는 내가 묻기 전까지 아내의 외도에 대해 절대 말하지 않았다.


이 접근이 모든 부정 망상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 증상이 악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 경험을 통해 배웠던 것은 치매 환자의 망상을 다룰 때 그 안에 혼재된 불안과 상실감을 같이 들여다봐야 그들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점이다.  


환자와 배우자의 건강 상태(health status)에 차이가 나면 부정 망상이 발생할 위험이 커진다고 한다. 나중에 딸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할아버지는 점점 시력을 잃고 있었다. 당뇨로 인한 합병증의 영향이었는데 아무래도 치매 증상이 있다 보니 늦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점점 뿌옇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할아버지가 느꼈을 불안과 상실, 잃고 싶지 않은 아내의 모습, 사라져 가는 세상과 자신을 향한 분노의 쓰라린 감정이 '부정 망상'이라는 복잡한 형태로 나타났던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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