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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기중 Feb 18. 2022

흰색 같은 사람

아침에 눈올 듯 흐린 날씨면 차로 아침 출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민해진다. 눈이라도 올라 치면 다른 차들과 어느 순간 연결된 기차처럼 일렬로 움직이며 같은 운명 공동체가 되어버리는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나라고 다르지 않다. 이리저리 끼어들라 눈치보다 정지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면 아쉬움에 핸들을 더 움켜쥐고, 두 눈은 신호등의 빨간색에 고정해둔다. 


병원이 얼마 남지 않은 횡단보도에서 저멀리 곧 바뀔듯 깜빡이는 횡단 신호와 폐지를 가득 담은 리어카가 보였다. 그 순간 나를 포함해서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미간을 찌푸렸을지 모른다. 곧 신호가 바뀔텐데 리어카의 첫 바퀴가 이제 횡단보도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리어카 앞에선 할머니 한 분이 작은 턱을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저리 무리해서 지나가려다 사고 나려면 어쩌려구.'

순간 짜증이 밀려오는데 이는 이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순간 리어카 뒤에 아주머니 한 명이 나타나 두 손으로 밀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고개돌려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마 고맙다고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속도가 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앞에서 끌고 있으니 함부로 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신호가 바뀌기 직전인데 둘은 아직 절반도 못건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모든 사람이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평소와 달리 신호가 바뀌었는데 아무도 경적을 울리지 않고 기다린다. 나 또한 경적을 울리려는 손을 지긋이 내려 놓는다. 마치 119 앰뷸런스가 지나갈 때 길가로 비켜주는 차들처럼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 모두 건너갈 때까지 숨죽이고 지켜보다 차를 움직인다. 둘이 횡단보도를 지나가고 나서도 급하게 시동을 거는 사람이 없는 것을 봐서는 대부분 짜증나는 마음에서 차분히 바라보는 입장으로 변했다.    


마음+마음+마음.....= ?


다양하고 복잡한 사람들의 마음이 섞이면 뒤죽박죽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으로 합쳐질 때가 있다. 이를 귀스타브 르봉은 그의 저서 '군중심리'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특히 부정적인 마음이 합쳐질 때면 그 힘은 더욱 강력하고 하나가 된다.


'군중'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국적과 직업, 성별을 불문하고, 또한 그들이 어떤 우연한 계기로 모였든지 상관없이 어떤 개인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군중'이라는 표현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그리고 오직 이런 여건에서만 인간들의 집합체는 이 집합체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특정과는 크게 다른 새로운 특성이 있다. 의식을 갖춘 개성은 자취를 감추고, 그 집합체를 이루는 모든 단위의 감정과 생각은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이 일시적이지만 대단히 명확한 특징을 드러내는 집단적 정신상태가 형성된다. 나는 더 나은 표현을 찾아내지 못했으므로 이 집단을 '심리적 군중'이라고 부를 것이다.
(귀스타브 르봉의 '군중심리' 중에서)


그런데 뒤섞이고 짜증으로 가득찬 군중의 마음 안에, 작은 돌을 던져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눈에 띄게 화려하지 않고, 욕을 먹을 것 같은 순간에도 덤덤히 자신의 길을 간다. 누군가는 이들의 모습을 눈치 없는 사람이나 외골수로 깎아내지만, 그런 부류에게 나타나는 억지스러움 대신 당연히 그렇게 살아온 자연스러움이 뭍어난다.  그들의 행동은 옳고 그름을 수없이 헤아린 선택의 결과도 아니요, 자신의 손익을 따진 계산된 영리함도 아니다. 그저 그의 삶이 행동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물감의 원색끼리는 섞으면 섞을수록 점점 어두워진다. 우리가 빨간색 물체를 눈으로 보는 것은 빨간색 빛만 물체에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고 나머지 색들은 흡수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여러 색을 섞으면 그 만큼 더 많은 빛을 흡수하고 그렇기에 점점 더 어두워진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색을 섞어도 밝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흰색을 섞는 것이라고 한다. 흰색을 섞느냐 안 섞느냐에 따라 혼합색이 밝아질 수도 또는 어두워지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그날 아침 운이 좋게 '흰색 같은 사람'을 만난 건지도 모른다. 아주 운이 좋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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