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거 받아라"
코로나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갑자기 뭔가를 건냈다. 이제 40대 중년 아저씨 둘이 공원벤치에 앉아 늘어나는 흰머리, 자식이야기며, 현실에 허덕이며 사는 씁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4월 늦봄, 짙은 초록으로 변하기 전 여리고 부드러운 새순이 친구의 손에 있다.
클로버 잎이다. 이제 막 땅을 뚫고 올라온 이 작은 생명은 '행운'이라는 단어와 마음 속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이거 뭐야, 클로버 잎 아니야?"
클로버를 건내 준 낭만적인 친구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잎의 갯수다. 마음 속으로 하나씩 세어본다. 하나, 둘, 셋. 잎이 세 장이다.
순간 헷갈린다. 세 잎 클로버가 좋은 것이었나 아니면 네 잎이었나?
나를 잘 아는 친구다보니 내 마음의 고민을 읽고 바로 답을 해준다.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이다."
"뭐야 그럼 이거 왜 준거야?"
순간 평범한 풀이 되어버린 세 잎 클로버를 손으로 비비며 가볍게 웃고 넘기려는 찰나, 친구가 말을 잇는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지만, 세 잎 클로버는 행복이래."
그리고 다음 말이 내 귀에 꽂힌다.
"요새 나는 세 잎 클로버가 좋더라."
딸들이 학교에서 배워와 알게되었다는 세 잎 클로버의 꽃말 '행복'
아마 친구가 말한 행복은 먼 미래의 막연한 상상이 아닌, 지금 내 옆에 있지만 지극히 평범해 우리가 눈길을 주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버릴지 모르는 그런 것들이리라.
친구는 이제 그런 것들을 지긋이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었나보다.
네 잎 클로버는 세 잎 클로버의 생장점에 상처가 나면 생기는 돌연변이라 한다.
상처로 죽지 않고 살아남아 오히려 잎을 하나 더 피운 질긴 생명력에 행운이라는 꽃말이 잘 어울린다.
그래도 친구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세 잎 클로버가 눈에 더 들어온다.
나 또한 '뜻밖의 큰 행운'보다 '소소한 행복'이 점점 소중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한편으로는 피식 웃음이 나온다. 다 큰 어른 둘이 클로버 풀이나 찾고 있으니 말이다.
고개드는 부끄러운 마음은 사람을 홀리는 벗꽃과 가볍게 불어오는 봄바람 탓이라 생각하며 크게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