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오도로키 호스케는 주인공이 아닌가?
스토리가 있는 매체에서 주인공 선정은 생각보다 중요했다. 주인공은 단순히 화면의 중앙에 서 있는 인물이 아니다. 작품의 전제를 증명하고, 감정을 끌어당기며, 서사의 압력을 견디는 중심축이다. 예전에는 이 구조를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라요스 에그리의 극작의 기술을 읽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주인공을 잘못 세우면 이야기 전체가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그 이론을 실제 사례로 증명해주는 작품이 바로 역전재판4다. 내가 어린 시절에 처음 접한 역전재판 시리즈다.
역전재판4의 표면적인 주인공은 오도로키 호스케다. 포스터 화면 중앙에 있고, 이 사람을 우리가 조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게임 안에서 이야기를 움직이고 감정의 무게를 끌어안는 인물은 나루호도 류이치다. 내가 주인공을 판단하는 기준은 세 가지다. 전제를 뒷받침하는가, 열망이 강한가, 극단에서 극단으로 도달하는 성장 곡선이 있는가. 이 세 가지 잣대를 대입하면 오도로키보다 나루호도가 훨씬 강력한 주인공성을 갖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전제부터 보자. 역전재판 세계관을 지탱하는 뼈대는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신념이다. 주인공은 이 전제를 행동으로 증명하는 인물이다. 오도로키도 플레이어의 분신으로서 사건 해결에 참여한다. 그런데 게임 안 그의 역할은 흐름을 ‘따라가는’ 쪽에 가깝다. 사건은 그에게 주어지고, 그는 주어진 틀 안에서 판단할 뿐이다. 반면 나루호도는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목표가 있다. 자신의 배지를 박탈한 인물에 대한 복수. 나루호도는 오도로키를 통해 그것을 실현해낸다. 전제는 나루호도에 의해 입증되었다.
열망 역시 둘을 명확하게 가른다. 오도로키는 끝까지 “어떤 목표를 반드시 이루겠다”는 강렬한 추진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신입 변호사로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열망은 큰 설득력을 주지 못했다. 플레이어는 그가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떠밀리듯 반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반대로 나루호도는 목적을 위해 기존 법정 시스템을 비틀려 하고, 그렇게 자신의 영향력을 되찾으려 한다. 열망의 크기 자체가 다르다. 서사를 끌고 가는 사람과 서사에 끌려가는 사람의 차이다.
성장폭은 더 분명하다. 오도로키는 게임 마지막에 법의 변화 속에서 정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전사가 되겠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런데 그 성장이 행동으로 설득력 있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말을 통해서만 성장폭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 나루호도는 복수와 누명 해소라는 극단적 여정을 통과한다. 그렇게 감정적으로도 서사적으로도 큰 변화를 이루는 데 성공한다. 플레이어가 느끼는 카타르시스의 중심은 온전히 그에게 집중된다. 역전재판4의 감정 축이 누구에게 놓여있는지 보여주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물론 변명은 가능하다. "오도로키는 세대 교체의 상징이다", "오도로키는 매너리즘에 빠진 역전재판 시리즈를 일신시키기 위한 캐릭터다" 역전재판 특유의 역전, 카타르시스, 깨알 같은 유머도 그대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작품의 구조적 결함을 덮어주지 못한다. 오도로키는 주인공다움을 갖추지 못한 주인공이었다. 대신 모든 서사적 무게는 나루호도에게 쏟아부어졌다. 결과적으로 이야기의 논리적 중심과 감정의 중심이 분리되었다. 이로 인해 작품의 완성도와 몰입도가 크게 흔들렸다.
주인공은 작품의 전제를 지탱하고, 열망으로 서사를 밀어붙이며, 극단에서 출발해 정반대의 극단으로 도착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래야 작품의 몰입도가 극대화된다. 역전재판4에서는 그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오도로키가 아니라 나루호도였다. 그리고 이 불균형이 작품의 평가를 좌우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게임은 주인공 선정의 중요성을, 그리고 그 선택이 서사를 어떻게 강화하거나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