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음악이 비명으로 바뀌는 순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 이 타이틀을 보면서 걱정한 게 있었다. 어려운 영화 아닐까. 의미만 잔뜩 앞세우진 않았을까. 다행히 이 영화는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딸을 찾으러 모로코 사막으로 들어간 아버지 루이스(세르지 로페스) 이야기다. 거기에 레이브 파티를 계속 하고 싶은 사람들이 끼어 있다. 그런데 이 출발은 곧 다른 방향으로 밀려난다. 이야기가 말하는 것이 점점 가족, 자유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들었던 질문. 대체 인간은 얼마나 쉽게 탈주하고, 쉽게 무너지는 존재인가.
루이스든 파티 참가자든 처음 목표는 명확했다. 루이스는 레이브 파티에 간 딸을 찾는 것. 파티 참가자들은 군인들의 통제를 피해 자유롭게 음악을 즐기는 것. 그런데 사막을 건너는 여정 속에서 그 목표는 점점 희미해진다. 그 기점은 루이스의 아들 에스테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그 이후 군인들이 땅에 묻어둔 지뢰로 사람들이 연달아 죽어나간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 이상 무엇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 그저 살아남고 싶어질 뿐이다. 그러나 그 소망조차도 좌절된다.
이 변화는 영화 속에서 흐르는 레이브 음악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파티장에서 음악에 몸을 맡기는 장면. 거기서 들리는 전자음악은 신난다. 자유, 젊음, 생기 같은 말이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처음 루이스에겐 이 음악이 소음처럼 들렸다. 그러나 루이스가 여정에 합류하면서 점점 그의 언어가 된다. 루이스와 파티 참가자들이 함께 어울리는 장면에 항상 레이브 음악이 들린다. 그렇게 음악이 연대와 희망의 상징으로 바뀌는 것이다. 무거운 음악도 유쾌하게 들렸다.
그러나 죽음이 반복되며 음악은 더 이상 즐길 수가 없게 된다. 분명 같은 장르다. 그런데 더 이상 신나게 들리지 않는다. 점점 소리가 죽음 앞에 놓인 인간의 비명처럼 바뀐다. 음악은 계속 흐른다. 그런데 슬프다. 최소한 살기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은 상태. 그 답답함이 묵직한 전자음 안에 맴돈다. 그들의 스피커가 모두 없어질 때, 그들이 붙잡을 음악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 인간의 욕망이 죽음이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단 걸 노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이 재앙을 군인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여정 시작 전, 그들은 분명 군인들에게 경고를 받았다. 피할 길이 있었다. 그럼에도 루이스 일행이 자기들 목표를 이루겠다고 경고를 무시한 것이다. 이 선택은 얼마나 인간이 죽음을 피하고 싶은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욕망이 얼마나 무력한지도 보여준다. 인간은 끝까지 스스로를 죽음에서 구원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갑작스레 등장하는 기차 몽타주조차 인물들의 선택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누군가의 개입이 있어야지만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이 장면을 희망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들의 여정이 그 개입 덕에 끝나니. 그러나 그 결말은 루이스 일행이 선택한 결말이 아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허락된 이동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성취라기보단 재난의 유예 같다. 이처럼 영화는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힘만으론 넘을 수 없는 선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는 그 속에서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찬 목소리가 죽음 앞에서 비명으로 바뀌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