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참혹했던 새해, 바뀐 건 없었다
표면적으로 서브스턴스는 늙어간단 공포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한물 간 여배우의 파국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비극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만의 비극이 아니다. 영화 속 세계는 애초부터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파국의 일면이었을 뿐이다. 젊음만 가치로 삼는 세계는 어떻게 사람을 자기 파괴로 몰아넣는가. 그리고 그 세계에 순응하는 사람의 비극은 왜 세계에 생채기를 남기지 못하는가. 이게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속 TV 에어로빅 방송 산업이 추구하는 욕망은 노골적이다. 젊음은 상품이고, 늙음은 죄다. 그 늙음으로 인해 사람은 더 젊은 사람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그 속 남자들의 모습도 추잡하다. 영화 속 여자들은 이 세계 속 남자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물질(서브스턴스) 취급만 받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50세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녀는 해고를 당했다. 그녀의 존재 가치는 이렇게 무너진다. 현실이라면 단순히 시간이 지나갔다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세계다.
영화 속에서 '서브스턴스'는 신체에 주입해 최고의 나를 만들 수 있는 약품이기도 하다. 그러면 7일 동안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대신 7일 동안 자신은 활동이 불가능하다. 이렇게 원래 나와 완벽한 나를 교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 리스크 가득한 해결책이 엘리자베스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영화 속 추잡한 세계관을 지속시키는 데 일조하는 선택에 불과했다. 자기 인기를 회복하기 위해. 그녀에게도 책임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기만 바라보았던 엘리자베스였다. 자기에서 태어났던 수(마거릿 퀄리)마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건 당연했다. 수도 엘리자베스의 늙은 모습과 7일밖에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엘리자베스를 증오하게 된다. 엘리자베스의 세계관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엘리자베스는 수의 아름다움과 인기를 질투하고, 수는 짧은 인생만 살 수 있도록 제한을 둔 엘리자베스를 증오한다. 이 둘에게 서로를 생각하는 모습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서로가 최선의 삶을 살도록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결국 수는 엘리자베스를 죽인다. 새해 날. 수로서 라이브 쇼에 오르기 몇 시간 전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수도 몸이 무너져간다. 모체 엘리자베스가 사라지면 그 생산물인 수도 죽는다. 그게 서브스턴스 약물의 규칙이었다. 결국 수는 원래 1번밖에 주사를 못하는 약물을 주사하고, 더 아름다운 내가 되길 다시 꿈꿨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기가 몬스트로 엘리자수란 괴물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해줄 줄만 알았던 몬스트로는 무대에 서지만, 사람들에게 괴물 취급을 받는다.
그 속에서 몬스트로는 피와 살점을 쏟아내며 파괴적인 분노를 쏟아붓는다. 그리고 명예의 거리에 있는 자기 이름이 새겨진 별 플레이트 위에서 한 점의 살만 남기고 죽는다. 그걸 보고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엘리자베스만 벌을 받는가?" 그녀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분명 피를 뒤집어썼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었다. 플레이트 위에 남겨진 핏덩이는 곧 씻겨나갔다. 방송 산업과 그 속 세계는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잠깐의 희생양으로서 헛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엄청 무서운 장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의 죽음이 헛된 이유. 이야기했듯 세계의 재생산에 그녀도 협조를 했기 때문이다. 방송 속 추잡한 세계관은 엘리자베스의 세계로 내면화되었다. 그리고 영화 내내 그녀는 의문 없이 그걸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영화의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려면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의 세계관 모두가 개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엘리자베스 한 사람만 죽어서 개선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본인도 그 세계관을 지속시킨 책임이 있으니. 그러니 그녀의 흘러넘치는 피와 살점만으론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괴물로서 죽었던 그 악몽 같은 새해. 결국 바뀌는 것은 없었다. 고어한 장면은 이제 통쾌하거나 무섭지 않게 느껴진다. 대신 허무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해서 영화 속 세계가 바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언제든 다시 나타날 것이다. 젊음과 남의 인정만 추구하는 세계 속에선 말이다. 그 비틀린 세계를 살고 있으면, 또 다른 희생양이 나타나 잠시 동안 세계의 모순을 진정시키는 과정이 필요할 테니.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