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예능 <알쓸인잡> 리뷰
전문가보다 박학다식가,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더 각광받는 시대이다.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진 지금 한 우물만 파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급변하는 현시대는 외골수와 같은 전문가보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가진 ‘제너럴리스트’의 자세를 더 요구하는 듯하다.
그러나 어릴 적 우리가 꿈꿨던 미래는 ‘전문가(Specialist)’에 대한 환상이 가득 담겨 있다. 예술가, 피아니스트, 가수, 과학자, 의사, 박사 등.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하는 점,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전문가'에 대한 환상을 만드는 걸까? 아니면 남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삶에 대한 사람들의 로망에서부터 시작된 걸까?
이런 판타지를 자극해 성공한 예능프로그램이 있다. 왠지 모르게 그들 사이에 끼고 싶고, 그들의 뇌를 몰래 훔쳐보고 싶은 심리를 자극하는. 바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로운 잡학사전’, tvn 알쓸신잡 시리즈이다. 2017년 나영석 PD의 기획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은 현재까지 여러 버전과 시즌을 선보였다. 특히 최근엔 <알쓸인잡>이라고 하여 ‘인간’을 주제로 한 새로운 버전의 프로그램이 방영 중이다.
<알쓸인잡>은 김영하 작가가 출연진으로 재등장해 <알쓸신잡>의 시리즈의 연장선인 듯 보이지만, 실은 <알쓸범잡> (알아두면 쓸데 있는 범죄 잡학사전, 2021-22)에 더 가깝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출연진이 각자 조사해 온 것을 바탕으로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식이다. <알쓸신잡>은 ‘여행’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각 분야의 전문가가 저녁 식사자리에서 한바탕 수다를 떠는 ‘예능적인’ 면모가 더 강했다면, <알쓸범잡>과 <알쓸인잡>은 시청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교양적인’ 면모가 더 강하다.
제작 초기에는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유쾌함과 볼거리를 제공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여행과 판타지를 섞는 것은 나영석 PD의 기획 특성이기도 하다. 여러 사회문화적인 변화, 팬데믹 시대의 도래, 인포테인먼트 예능의 범람화 등으로 인해 현시대에서의 알쓸시리즈는 더 이상 새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2022년 12월 2일에 첫 방송을 한 <알쓸인잡>은 여러모로 흥미로웠다. 여러 우려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인간’이라는 사변적이고도 철학적인 주제를 프로그램 핵심 키워드로 가져간 점, MC로서는 첫 도전인 장항준과 세계적인 가수 방탕소년단의 RM의 등장, 스토리텔링 예능의 홍수 속에서 ‘알쓸인잡’은 과연 어떤 차별점을 던져줄 수 있었을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왠지 모르게 평등하고 평온한 분위기였다. 주제가 ‘인간’이어서 단순히 그랬던 걸까? <알쓸신잡>(2017-8)은 기획단계 당시 전 정치인이자 지식 소매상인 유시민 작가를 첫 섭외로 염두에 두었기에, 본의 아니게 그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분위기가 있었다. 흘러간다기보다는, 출연진이 그를 자연스럽게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일반 식사자리에서와 같은 일상적인 분위기의 토크쇼이다 보니, 친밀감과 지식의 유무에 따라 힘이 기우뚱했고 가끔은 시청자가 소외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알쓸인잡>에서는 힘의 균형이 기울어질 만하면 MC들이 본의 아니게(?) 중심을 잘 잡는다.
이 대목에서 <알쓸인잡>의 출연진 구성을 짚고 넘어가 보자. 이야기를 풀어가는 전문가 출연진엔, 알쓸 시리즈의 터줏대감 김영하 작가와 김상욱 물리학자, 그리고 <알쓸범잡>에서 잠깐 얼굴을 비추었던 이호 법의학자와 뉴페이스 심채경 물리학자가 있다. 마지막으로 예능에는 자주 얼굴을 비췄던 만담가 장항준 감독과 이런 예능엔 거의 처음인 RM 김남준이 MC를 맡았다.
가장 궁금했던 두 MC는 의외로 합이 잘 맞는다. 나이차가 무색할 정도로 오히려 김남준이 듬직하고 장항준은 역시나(?) 귀여움을 담당한다. 김남준의 적극적인 리액션은 회차가 거듭해질수록 자연스러워졌고, 유일한 20대로서 젊은 세대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들려주는데 박학다식한 면모로 인한 통찰력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감독 장항준. 그는 다양한 예능에서 달변가를 자처하기에, 이러한 예능에 나오는 일 자체가 별로 특별할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은 어쩌면 MC에 있지 않을까 싶다. 경청의 태도, 듣고 정리하면서 토크의 흐름을 잡아주어야 하는 일이 MC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하는 MC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 ‘겸허’의 태도가 추가된다. 그는 스스로를 낮춘다. 이는 이전 알쓸 시리즈에서 ‘바보 역할’을 어쩔 수 없이 맡아야 했다는 뉘앙스를 내뱉는 유희열의 태도와는 조금 다르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수용하고, 궁금한 것은 숨기지 않고 물어보며 자신을 낮추어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짝꿍 MC인 김남준과 시청자의 대변자로 웃고 떠들다가도 공인, 예술가로서의 고민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김남준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한다. “난 예술가로서 그런 고민해본 적이 없당~” 하며 “이 사람은 진짜 거장이구나~”하며 김남준을 우러러보는 대목에서 좌중은 폭소를 한다. 어떻게 보면 그 자신도 업계에서는 위치가 있는 감독인데, 이런 솔직함이 그를 정말 매력적이게 만든다.
따라서 프로그램 안에서도 그는 가장 낮은 자세를 취하면서, 전문가들과 대중들의 간극을 좁힌다. 전문가 출연진들을 박사님들이라고 하면서도, “아 여기 석사도 있지~” 하면서 힘의 균형을 맞춘다. 밉지 않은 장항준의 말투나 태도를 떠올리면, 현장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편해졌음을 느낄 수 있다.
이 평온한 분위기에 힘을 더하는 게스트가 한 명 있다. 바로 뉴페이스 심채경 박사. 김남준은 ‘실눈캐’라고, 장항준은 ‘외유내강’이라고 호칭하는 심채경 박사는 가장 베일에 가려져 있었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존재감을 발휘한다. 실눈캐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항상 눈이 없어지도록 웃어준다. 엄치 척의 따뜻한 리액션은 기본이고 끊임없이 옆의 사람을 챙긴다. 4화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준과의 대화에서도 그렇고, 알쓸시리즈에서 항상 외롭게 이공계열의 이야기를 해왔던 김상욱과의 티키타카에서도 느낄 수 있다.
특히 김상욱 물리학자와 케미는 대단하다. 뭐랄까, 이전에는 논리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친절한 학자로서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에 충실했다면 이번 시즌에서의 김상욱은 아이같이 기뻐하는 모습도 보이고 이공계열 특유의 냉철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면에서, 그 또한 이 안에서의 분위기를 꽤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김영하 작가는 유시민 작가의 바통을 이어받아 명불허전 ‘지식소매상’으로서 이전 알쓸신잡에서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도 프로그램의 정수를 담당한다. 하지만 방송쟁이, 베스트셀러의 작가로서 자기 이야기를 하기는 퍽 어렵다는 것이 느껴졌고, 대신 대중의 입맛에 맞춘 지식으로 프로그램에서 적절히 간을 돋우는 조미료 역할을 해낸다.
마지막으로 이호 법의학자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업(業)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한 직업인인데, 인간이 인간에게 가져야 할 따뜻한 인류애나 태도에 대해 늘 이야기한다. 2화 히포크라테스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도 그렇고, 3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동료를 언급한 점에서도 그렇다.
이 외에도, 내용 자체에도 인상적인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소위 지식인들이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해서 좋다. 매 회 주제에 따라 출연진은 소개해주고 싶은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자세히 듣다 보면 그들 자신과 닮아있다. 업계에서 일하는 동료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역사적 인물 됨됨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기도 한다. 확실히 ‘인간’을 주제로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출연진의 캐릭터가 드러나는데, 다행히도 케미를 자아내는 각 출연진의 구성이 좋다. 앞으로 더욱더 농익어질 그들의 화합이 궁금하다.
끝으로 글의 서문을 열었던 ‘전문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우리가 그들에게 가진 환상은 단순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혹은 열정이 대단해서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전문가(Specialist)들은 자신의 업(業)에 대한 존경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곧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기인한다.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고, 더 잘하기 위해서 혹은 더 완벽해지기 위해서 오랜 시간을 들인다.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한 우물을 판다는 건, 자기 자신을 들여다봤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시리즈보다도 이번 <알쓸인잡>이 기대되는 이유는, 커리어의 정점에 오른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 그리고 자신을 지켜온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직업이 사라지고, 동시다발적으로 급변화하는 시대에 유연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의 자세가 당연히 더 갖춰야 할 덕목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불확실함이 가득한 시대에, 자신의 업을 사랑하고 남들이 뭐라 하든 한 분야에 오롯이 자신의 열정을 불태우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의 자세를 갖춰야 하는 건 아닐까?
심채경 박사의 말처럼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내 안에 중심을 두는 게 필요하다. 전문가의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본다면, ‘알쓸인잡’의 출연진처럼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고 따뜻함을 온전히 전해줄 수 있는 진정한 전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